[민병욱의 민초통신] 아둔한 군주, 아첨꾼 신하

@민병욱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입력 2024.11.19. 10:11
민병욱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세상에 간신이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다만 현명한 임금이 그들을 잘 살펴 적절히 부림으로써 나라를 바른길로 이끌어나갔기 때문에 그들은 제멋대로 술수를 부릴 수 없었다. 만약 임금이 한번 그 술수에 빠지면 나라를 위기에 빠트려 패망에 이르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고려사 간신 편의 서두다. 나라 밑동을 뒤흔드는 간사한 신하는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 밑에서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 4.19와 "총은 쏘라고 준 것"

민주 공화국이 된 우리 현대사에도 간신이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사리 판단이 어두운 아둔한 대통령 아래서 그들은 발호했다. 권력자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요설을 쏟아내고 주권자 국민은 그냥 졸(卒)로 치부했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 후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기자회견에서 8명이 숨진 마산 발포사건 질문을 받자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고 태연스레 받아쳤다. 그는 또 마산 시민의 부정선거 항의 데모에 대해서도 "앞으로 윤리 도의보다 법이 제일이라는 걸 가르치고 싶다" "3·15선거는 공명선거랄 밖에 없다"라는 말들을 쏟아냈다. 여당 자유당은 선거기간 일어난 불상사는 '승자의 아량을 베풀어' 문제 삼지 않겠다고 선심 쓰듯 발표했다. 무소속 장택상 의원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공개장을 통해 "한국 청소년들을 쏘라고 총을 준 건 아니지 않나. 대통령은 주변에 모여든 간세배(奸細輩·간신 무리)의 감언에 속지 말고 바로 하야, 정계 은퇴해 명예를 살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선거가 비교적 공명하게 치러졌고 동일 정당에서 정 부통령이 나왔으니 '나랏일도 잘돼 나갈 것'이란 담화를 발표했다. 한 달 후 대통령은 혁명 물결에 떠밀려 하야 망명했고 부통령은 자식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10·26, "데모대 1~2백만 죽인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쏴 시해했다. 7년을 이어온 유신독재와 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등 정치 인권탄압, 물가고에 항거한 부마 민주항쟁 직후 일어난 일이다. 훗날 군사재판에서 김재규는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을 쏜 경위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부마항쟁 현장을 둘러보고 민심 완화책을 건의했으나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는 것. 오히려 "사태가 더 악화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겠다. 대통령인 내가 명령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를 부추기듯 차 실장이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천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겠습니까"라며 캄보디아 킬링필드 비유까지 들이댔다는 것이다. 정보부장이 직접 보고 전하는 민심에도 다가갈 생각을 안 하는 대통령의 어두운 사리 판단과 자만, 거기다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국민을 적대시하고 내몰아치는 최측근의 아부 아첨 모습을 보면서 그는 몸과 마음이 다 떨렸다고 진술했다.

# "일어나면 출근 잠들면 퇴근"

백성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임을 깨우쳐준 민주화 이후에도 최고 권력자를 향한 아부성 발언들은 끊이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참사가 일어난 5개월 후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아침에 일어나서 주무실 때까지가 근무시간이고 어디 계시든 있는 곳이 집무실"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의원 질의에 그는 "비서실 직원들은 사무실로 출근을 하지만 대통령은 어디서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바로 출근이고 자는 것이 퇴근"이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 시절 한 여당 의원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연주 영상을 올리고 "잔잔한 호수에 비치는 달빛의 은은함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런 달빛 소나타가 문재인 대통령의 성정을 닮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 그는 대통령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역시 문 대통령 시절 중국 국빈 방문 중 대통령이 혼자 아침을 먹은 것이 여론의 질타를 받자 한 참모가 "대통령은 혼밥을 한 게 아니라 13억 중국 국민들과 함께 조찬을 하신 것"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항간에서 "밥값은 1인분만 내고 무려 13억 명과 식사 대화를 했으니 이 시대 최고의 경제 전략가"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 '어찌 됐든 사과'가 진심 사과?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을 맞아 실시한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는 거의 부정 일색이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다수 언론도 강한 아쉬움을 표했다. '어찌 됐든 사과'는 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종잡을 수 없어', '지지율 17%를 납득하게 만든 125분 회견'이었고 결국 '허무하고 허탈'했다는 감상이 제목으로 뽑혀 나왔다. 이런 회견을 해놓고도 과연 임기를 완주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부호 또한 적지 않게 달렸다. 특히 명태균 씨와의 통화 육성이 공개돼 대통령 부부의 공천개입과 국정농단이 사실로 굳어진 듯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내놓은 해명 설명을 진심 어린 사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통령실과 국민의 힘이 내놓은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 대통령실은 "최선을 다해 진심을 담아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했다. 여러 의혹에 대해서도 소상히 설명해 상당 부분 해소됐다"라며 "답변이 매우 안정적이고 좋았다"고 자화자찬했다. 국민의 힘 역시 "국민이 궁금해하는 모든 현안에 대해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라는 공식 성명을 냈고 한 의원은 "나는 정말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라며 대통령을 둘러싼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져도 "유럽에 지지율 20% 넘는 정상이 많지 않다"라고 답변하는 비서실장과 "지지율에 일희일비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는 정치학자 출신 여당 의원. 국회 개원식은 물론 시정연설도 거부한 대통령을 "대인이시며 제일 개혁적인 대통령인데 국회가 진정한 존경을 보이지 않는다"고 성토하는 총리. 대통령이 대학입시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연구한 해박한 전문가여서 우리도 많이 배운다는 부총리와 대통령처럼 AI에 대한 이해 인식이 뛰어난 분이 없다는 장관. 또 대통령이야말로 아내를 철저히 보호하는 상남자라고 한껏 올려세우는 사람 등등. 그런 참모와 측근에 둘러싸여 있는 걸 부끄럽게 생각할 줄만 안다면 윤 대통령 개혁은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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