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남구

"재해·재난 이겨내는 협동···생존 위한 격렬한 몸짓"

입력 2022.10.05. 18:45 이석희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⑨] 대촌동 고싸움놀이
거대한 용 두마리 솟구치는 모양
집단 편싸움으로 마을 단결 길러
윗마을 이기면 안녕·평온 깃들고
아랫마을 승리하면 풍년이 든다
역경 극복하는 공동체 정신 총화
1970년 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
고싸움놀이는 1940년을 전후하여 사라졌다가 1969년 전남대학교 지춘상 교수에 의해 재현되었다. 제10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돼 국가차원의 보존과 전승이 이뤄지고 있다. 그림=김집중작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남구⑨]남구 대촌동 고싸움놀이 

용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이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용머리가 전면으로 돌진하는 상황. 평행으로 달리는 것은 놀이이지만 마주보고 달리는 것은 투쟁이다. 급기야 둘은 충돌하여 솟구쳐 오른다. 대륙과 대륙이 맞부딪쳐 에베레스트 산맥이 솟아오르듯이 수평의 힘이 극한으로 나아가면 둘은 합쳐져 하나의 수직이 된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그 꼭대기에서 1000년 전의 한 장수가 힘차게 팔을 뻗어 올리며 “밀어라!”라고 외치면 민중은 “와아!”하고 함성을 내지르며 전진하는, 힘과 힘이 충돌하는 격정과 흥분의 도가니. 


◆88올림픽 개막 행사 '수작' 평가

고싸움놀이는 88서울올림픽 개막행사의 백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총체라 할 올림픽에서 한 아이가 굴렁쇠를 몰아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격렬한 남자들의 편싸움인 고싸움놀이로 개막하여, 유연하게 펼쳐지는 여성성의 강강술래로 폐막한 것은, 올림픽의 정신과도 잘 어울릴뿐더러 우리 민속놀이를 세계에 선보인 수작(秀作)의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광주 남구 대촌동 칠석(漆石)마을. '칠(漆)'이 옻을 뜻하여 '옻돌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전형적인 남도의 농촌마을인데 들이 넓어 동네가 크다. 거기 폭 2m 정도의 작은 '고삿길'을 경계로 동쪽을 상칠석(웃대미), 서쪽으로 하칠석(아리대미)으로 나뉜다. 상칠석에는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어 할아비가 좌정하는 윗당산이 있다. 하칠석에는 큰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어 할머니가 좌정하는 아랫당산이 있다. 윗당산 큰 소나무는 고사하여 지금은 새로 심은 4그루의 소나무가 그것을 대신한다. 이곳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인 14일 자시에 당산제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두 마을이 회의를 하여 화주와 정자, 헌관과 축관을 선출하는데 모든 제관은 개고기나 산고기 등 부정 타는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부부동침도 삼가야 하는데 방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는 서로 거꾸로 잠을 자야한다고 한다. 초저녁에 불 피우고 농악을 치며 한판 놀다가 밤 11시가 되면 두 마을 사람들이 합동으로 먼저 할아비 당산에 제를 올리고, 술상을 차려 한 숨 돌린 뒤에, 아랫마을 할머니 당산에 제를 올린다. 그러면 날이 바뀌어 새벽 1시다.

결혼(結婚)의 '혼(婚)'은 황혼이다. 수컷은 양을 뜻하여 낮이 되고, 암컷은 음을 뜻하여 밤이 되니, 신랑 신부는 낮과 밤이 만나는 황혼에 맺어지는 것이다. 옛날에는 결혼식을 해거름에 했다고 한다. 먼저 떠난 조상의 당제를 올리는 때, 자시(子時)는 밤 11시~새벽 1시이다. 지지(地支)의 시작이며, 오늘과 내일이 만나는 시간이다. 가고 오는 것, 할아비와 손자(祖孫), 신과 인간의 경계가 그 어디쯤 있으리라, 향을 피워 가신 이를 추모하고 산 사람들의 내일을 기원하는, 때의 선택이 이토록 지혜롭다.

광주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 고싸움놀이.

◆줄다리기 앞놀이 '고쌈'에서 유래

당산제를 지내고 나면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고싸움놀이가 시작된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이나 노끈을 매면서 한 가닥을 길게 빼어 홀쳐 매듭지을 때 둥그런 모양으로 도드라져 나온 것을 말한다. 주먹 하나 넣은 공간을 만들어 두루마기 옷고름을 여미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고싸움의 유래는 딱히 기록이 없다. 풍수설에 따르면 옻돌마을 터가 황소가 쪼그려 앉은 '와우상(臥牛相)'이라 기가 세기 때문에 이를 누르기 위해 고싸움을 했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지춘상 교수는 대촌 뿐 아니라 남도 곳곳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아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장흥 영암 강진 등지에서 줄다리기의 앞 놀이로 고줄을 서로 맞대 싸움을 벌이는 '고쌈'놀이를 했는데 그것이 후대 지역별로 변형되어 고싸움놀이가 된 것이라고, 책 '옻돌마을 사람들과 고싸움놀이'에서 밝히고 있다.

고싸움은 '고줄'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고줄은 새끼 세 가닥을 합쳐 팔뚝처럼 단단하게 꼬아 만든다. 줄다리기의 줄은 튼튼하고 길면 되지만, 고줄은 줄 머리에 둥근 고를 칭칭 감아야하기 때문에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있어야 한다.

다음 '고'를 짓는데 통대나무를 이용하여 둥글게 휘어지는 '곳대가리'를 구성하고, 이어 '고몸뚱이'와 '꼬리'를 만든 뒤에 '가랫장'을 이어 붙인다. 고 몸체의 길이는 10m 정도이고, 두 가닥의 꼬리도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 전체 길이가 약 20m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굉갯대'다.

40도 정도 들어 올린 둥근 고머리가 상대편의 고머리와 정면충돌할 때 부러지거나 틀어져버리면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승패가 나버리기 때문에 Y자형의 통나무를 대고 고머리를 받쳐주어야 한다. 이 받침목을 굉갯대라 한다. 비로소 완성된 '고', 하늘을 향해 치든 크고 둥근 고머리를 굉갯대가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사뭇 웅장하다.

고싸움놀이전수교육관

◆고가 하늘로 오르면 접전 벌어져

열엿새날 밤 드디어 고싸움이 붙는다. 사방이 횃불로 타오르는 너른 들을 향해 '농자천하지대본'이라 쓴 깃발을 휘날리며, 농악대가 전의를 북돋우며 앞서 나아가고, 그 뒤로 고싸움의 총지휘관 '줄패장'과 부장들이 꼭대기에 타고, '멜꾼' 50여명이 고를 메고,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꼬리줄잡이가 되어 출전하는 모습은, 마치 양쪽에서 거대한 용 두 마리가 승천하기 위해 머리를 들고 일어서는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여기에 흥겨운 출전가가 빠질 수 없다. 부장이 '배를 무어라/ 배를 무어라'하고 메기는 소리를 넣으면 '사―아 어뒤허 어뒤―허'하고 멜꾼들의 받는 소리가 뒤따른다. '삼강오륜으로 배를 무어라/ 사―아 어뒤허 어뒤―허/ 효자충신 열녀로 돛을 달아/ 사―아 어뒤허 어뒤―허/ 아무리 질풍같은 풍파를 만나도/ 사―아 어뒤허 어뒤―허/ 내배 파선이야 될 수 있으랴/ 사―아 어뒤허 어뒤―허'

드디어 고와 고가 전면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다. 줄패장이 "밀어라"하고 소리를 지르면 멜꾼들은 "와~" 함성을 지르며 가랫장을 두 손으로 뻗쳐들고 돌진, 두 개의 고가 정면충돌한다. 고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때 줄패장은 고 위에서 상대를 밀쳐 넘어뜨리기 위해 접전이 벌어진다. 서로 밀치기를 10여분, 멜꾼의 힘이 부치고 불리하다 싶으면 줄패장은 재빨리 "빼라"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고와 고가 떨어져 나가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잠시 대치하다가 다시 농악대가 소리를 뿜고, 횃불과 깃발이 나부끼면서 전의가 북돋아 오르면 "밀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재차 충돌하면서 싸움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렇게 몇 번이고 부딪혔다가 떨어지기를 거듭한 끝에 상대방의 고를 짓눌러 땅에 닿게 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양측 모두 필사적이고 격렬한 싸움이라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아 밤새도록 고싸움이 펼쳐지기도 하고,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이긴 쪽이 고를 메고 승전가를 부르며 마을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술을 내놓고 잔치를 벌인다. 이튿날 진 쪽에서 분통이 터져 재대결을 꾀하려고 시비를 걸고, 그러다 다시 고싸움이 붙어 스무날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영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고를 풀어 줄을 만든 다음 2월 초하루 '줄다리기'로 최후의 결판을 내기도 한다. '고싸움에 이기면 논 세마지기 산 것 보다 낫다'는 말과 '상칠석 마을이 승리하면 마을에 안녕과 평온이 깃들고, 하칠석 마을이 승리하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한다.

◆전통 문화 우수성 세계에 알려

"우리 삶은 알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때 없이 찾아오고, 사는가 하면 죽어 사라지고, 어느 해는 한발이 들더니 어느 해는 범람하고, 풍년인가 하면 태풍이 흔들어 놓지 않습니까? 농경사회의 불안정한 삶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무언가를 갈망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당산제를 통해 조상님에게 안녕과 풍요를 비는 것이지요."

이용연 광주칠석고싸움놀이 기획위원장은 "당산제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기원이라면 고싸움놀이는 현실적으로 닥쳐오는 재해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집단놀이를 통해 단결력과 협동심과 패기와 투지를 기르면서 생존해 나가기 위한 격렬한 몸짓이며, 공동체정신의 총화"라고 고싸움놀이를 설명했다.

삼한시대부터 내려온 고싸움놀이는 1940년을 전후하여 사라졌다가 1969년 전남대학교 지춘상 교수에 의해 재현되었다. 제10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 국가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돼 국가차원의 보존과 전승이 이뤄지고 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때 식전식후 행사로 진행되어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광주 남구청은 1983년부터 칠석동 고싸움놀이 전수관에서 매년 축제를 열고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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