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목 10마와 마을 행정력 동원 압박, 철문안에 갇힌 어린 노동

입력 2026.09.28. 17:22 이용규 기자
5. 소녀들은 어떻게 공장에 왔나
종방 값싼 노동력찾아 광주 진출
공개모집에서 강제동원으로 악용
부모 마음 흔든 광목 수탈 족쇄
총독부, 노동력 충원 뒷배 역할
해방직전 미성년 강제연행 확산
일제 말단 행정력도 징발 압력
일제강점기 종연방적 임동방직공장 식당 모습. 광주역사민속박물관제공

종연방적의 경쟁력은 여성노동력에 있었다. 종연방적이 면화생산지인 광주에 투자를 결정한 요인도 저임금으로 여성 인력 확보가 원활할 것이라는 조선총독부 설명과 자체 조사에 의한 분석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 섬유자본은 광주전남의 풍부한 노동시장을 황금어장처럼 여겼다. 현대식 건물과 시설을 갖춘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도시생활을 동경하거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자리를 찾던 여성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기계가 지배하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민족 차별에 의한 노동력 수탈과 인권유린으로 시달려야 했다. 종연방적의 여성 노동을 단순히 자발적 취업이나 강제동원 어느 하나로만 딱 잘라 설명하기는 어렵다. 초기에는 공개모집을 통한 취업이 존재했지만 전시체제가 강화될수록 행정조직까지 동원한 압박과 강제성이 짙어졌다.

방직공장의 앳된 여성노동자. 사진 출처 ‘전방 30년’

1930년 제사공장으로 광주에 발을 들인 종연방적은 1934년 임동에 방적공장 설립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자 확보에 나섰다. 기술자와 관리직은 전부 일본인으로 채웠다. 반면 생산현장의 노동자는 광주전남을 중심으로 모집했다.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 당시 일제 자본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 면직산업 노동자의 30% 이상이 여성이었다. 현대식 기계가 도입되면서 섬유산업의 생산 현장에 여성 노동력이 대거 투입된 결과다.

여성 노동자를 확보하는 방식은 4가지였다. 직업소개소를 통한 모집, 기존 노동자의 지인 소개, 전문모집인을 통한 충원, 개별 접촉이었다.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던 공장 가동 초창기에는 신문에 모집광고를 내거나 직업소개소를 통한 방식이 주를 이뤘다. 1936년 1월11일자 군산일보에 실린 종연방적 전남공장 노동자 채용 기사는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임동공장이 1935년 8월 준공돼 부분조업에 들어간 뒤에도 노동자 모집은 계속됐다. 당시 모집 대상은 신체가 건강하고 가급적 미혼인 14세부터 30세까지 300명이었다. 종연방적은 1차로 지원한 120명 중 71명을 채용했다. 일본에서는 노동법 제정으로 16세미만을 노동자로 채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버젓이 16세 미만 소녀들도 모집 대상이 됐다. 종연방적 채용과 연구조사보고서 등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12.4세였다. 미성년 소녀들이 성인과 같은 노동조건에서 가혹한 노동을 감당했던 셈이다.

전문모집인도 농촌을 돌며 노동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들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어 해독이 어느 정도 가능한 10대 소녀와 부모를 찾아 취업을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모집인들은 대상자 가족에게 광목(廣木) 10마(9.6M)를 선급금처럼 내놓았다. 폭이 96센티인 광목10마는 빈농가정의 식구 전체가 넉넉하게 옷이나 이불을 지을수 있는 적지않은 양이었다. 실생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광목을 선급금으로 제시해 부모의 환심을 산 것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1930년대 광주전남에서 광목 10마의 값어치는 여성 노동자의 5~6개월어치 임금에 해당했다. 질기고 쓰임새가 많았던 광목은 농촌에서 화폐처럼 거래될 만큼 환금성이 높았다.

광목을 다듬이질 하고 있는 종연방적 여성 노동자들.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공

옷감조차 귀했던 소작농에게 광목 10마는 쉽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부모에게는 당장의 생계를 덜어주는 물품이지만 결과적으로 어린 딸을 공장으로 떠미는 강력한 경제적 유인이자 사실상 빚으로 작용했다. 회사가 이만한 대가를 내걸 정도로 어린 여성노동자 확보는 중요한 과제였다. 모집인의 설득이 끝나면 공장 인사과 직원이 면접을 거쳐 채용 여부를 결정했다.

공장 담당자들도 직접 여성 노동자를 찾아 나섰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과 달리 연령과 관계없이 심야작업에 투입할 수 있었기에 어린 노동자를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회사에는 이득이었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지역 행정조직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지금의 면사무소 직원에 해당하는 구장이 노동자 모집에 관여했다. 회사는 모집을 도운 구장에게 당목 등을 사례품으로 건네기도 했다.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구장을 노동자 확보의 통로로 활용한 것이다.

근로정신대시민모임이 지난 2021년 종연방적 임동공장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 8명을 대상으로 구술한 채록집에서도 이런 정황이 확인된다. 8명 가운데 5명이 “동네 구장의 권유로 방직공장에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보성 출신인 최점덕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때는 구장, 반장 때문에 억지로 갔지. 가라고 했응께 갔지. 우리 딴에 갔겠어. 거기를 구장, 반장이 서두른 께 갔제. 그때는 구장, 반장을 다 못해보고 안사요.”

지역에서 모집된 소녀들은 함께 광주공장으로 이동했다. 고향을 떠나 공장에 도착하기 까지 마음을 바꿔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인 행동이 제한됐고 감시도 따랐다.

매일신보 1941년 7월2일자에 실린 ‘광주종방 수련장 개장식’ 모습. 종방은 1938년 공장 내에 수영장을 건설한다. 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1년부터는 거금 100만원을 들여 대규모 유원지 조성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당시 불안정한 국제 정세에 발목을 잡히고 만다.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공

처음 마주한 임동공장의 거대한 규모는 농촌에서 온 어린 소녀들에게 낯선 광경이었다. 함평출신 이금옥 할머니의 당시 상황의 증언이다.

“넓은 데다 우리를 떨어 뜨려놓았는데 굴뚝이 보였어요. 제일 먼저 도착해서 밥먹는 식당을 구경시키드만, 일본 사람이 강의할려면 큰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는데. 거기는 엄청넓어. 운동장에 사람들이 다 나오면 개미 새끼들처럼 까맣게 나오지.”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노동력확보 방식이 더욱 강압적으로 변했다. 일본이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조선인의 노동력을 전쟁수행에 동원하기 위한 각종 제도를 확대했다. 종연방적의 노동자 모집에도 행정조직을 동원한 압박이 강해졌다.

조선총독부와 모집관계자들은 가난한 농촌의 소녀와 부모들에게 “학교에 보내주겠다„ “하루 40전을 벌 수 있다”는 식으로 취업을 권유했다. 그러나 당시 40전은 실제 받을 수 있던 명목상 일당의 1.5배가 넘는 액수였다.

가혹한 노동현장이 알려지면서 방직공장 취업을 꺼리는 이들도 늘었다. 노동자 이탈까지 겹치면서 인력 충원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노동력 부족이 심해지자 행정조직을 통한 강제적인 동원이 확대됐다. 모집대상도 10대 소녀에서 갓 결혼한 여성과 과부까지 넓어졌다.

1944년 8월 일본은 여자정신근로령을 미성년 여성들의 노동 동원을 제도화했다. 근로보국대 이름으로 마을별 인력 공출이 극심했다. 끌려간 사람과 이를 피한 가족 사이에 원한과 갈등를 낳으며 농촌 공동체를 흔들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강제성은 더욱 짙어졌다. 관련 연구에서는 종연방적 임동공장 여성노동자 80%가 피동적으로 모집된 것으로 파악한다.

매일신보 1936년 1월15일자에 소개된 종연방적 임동공장 여성노동자 모집 기사(오른쪽)와 종연방적 임동공장 진출로 인구 증가를 알린 당시 보도.

해방 무렵 전국에서 방직업 노동자는 5만1천815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전남에서 소집된 인원은 3천명에 이르렀다. 강제노동에 끌려간 소녀들의 평균 나이는 13.2세였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1944년 12월 군수공장으로 지정됐다. 노동력 확보 과정의 강제성과 작업장의 가혹함이 심해졌다. 당시 노동자 채용기준은 신체 건강한 12세이상으로 규정돼 있었지만 실제 현장에는 그보다 어린 소녀들도 적지않았다. 여성 노동자의 보통학교 졸업 비율은 20%에 불과했다. 이들은 전쟁 말기에는 6개월의 견습과정 조차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작업장에 배치되기도 했다.

집을 떠난 소녀들은 임동공장안의 거대한 철문안으로 들어갔다. 소녀들은 오로지 이곳에서 일제 섬유자본과 전쟁체제를 떠받치는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됐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슬퍼요
1
후속기사 원해요
1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전남광주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1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