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중세의 비경을 간직한 샤탈라 下
고요의 화석이
모여 있는 저,
저 나무숲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
나는 걷는다
죽음보다 더 깊고 먼
피안의 땅
별과 별사이를
바람과 바람사이를 걷다가
걷다가
늙고 큰 나무아래 앉아
쉰 소리로 노래 부른다
눈물이 지워지지 않는
너의 눈빛이 노을에 머문다
내가 걷던 저문 길
어둡고 쓸쓸하지만
너처럼 따뜻하다
사는 것이
모두들 풀잎의 침묵이지만
나는 살아간다
너의 눈빛으로
언덕 위 나무 한그루
미동도 없이 서있다
아, 사는 것이 이와 같다
(한희원의 시 -사는 것이 이와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고향이 있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뛰어 놀았던 고향 풍경은 가슴에 화석으로 남아 어느 날 불현 듯 다가온다. 그럴 때면 아련한 아픔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 찾아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추억의 장소를 찾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으면 마음에는 생채기가 남는다.
유년기를 보냈던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예전의 집과 골목길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재개발 지역으로 고지되어 거대한 포크레인이 들이닥쳐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닐 때 가슴 안에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다. 지상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풍경 속을 걸어 다니며 옛 친구들 집에서 창틀이며 문짝, 명패 등을 수거했다. 오래 묵은 물건에는 시간이 들려주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내 고향은 언덕 위를 지키던 아름드리 나무들은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는 큰 몸짓을 자랑하는 생소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사라진 풍경 속에는 지나온 사랑이 다 들어 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고향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 지금은 내 곁을 떠난 어머니를 대하듯 포근하다.
천 년 전 중세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신화의 마을 샤틸리는 어떤 모습일까. 수도 트빌리시에서 북쪽으로 해발 2700m의 험준한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야만 만날 수 있는 곳. 조지아는 경제 여건상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다. 특히 군사와 무역이 발달되지 않은 지역의 산악 도로를 달리면 온 몸의 신경들이 곤두서는 아찔함을 경험하게 된다. 카즈벡의 스테판츠민다로 가는 도로는 2000m가 넘는 산악 도로이지만 러시아와 교류가 빈번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그렇지만 샤틸리로 가는 산악 도로는 트빌리시에서 출발해 6시간 정도를 가파른 낭떠러지 길을 보며 달려야 한다.
아스라한 낭떠러지 길 아래로는 코카서스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강물 소리만이 외롭다. 강 옆의 초목에는 말이 홀로 풀을 뜯고 있다. 산과 산 사이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나무들은 외로울 틈도 없이 흔들린다. 바람결을 따라 그곳을 찾은 이방인의 마음만 어지러울 뿐이다. 겹겹이 보이는 산맥을 넘고 넘으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11세기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성채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거대 자본의 힘을 거부한 채 천 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색이 바랄대로 바란 암갈색의 석조로 지어진 성채가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산 아래의 세월을 견디며 서 있다. 60개의 망루로 지어진 방어용 성채이다. 샤틸리 마을은 러시아 체첸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깊은 산 속의 성채도 강대국의 침입을 견뎌야 했던 운명이었을까. 조지아는 바다와 접한 항구 도시나 내륙 깊숙이 산맥 틈 사이에 있는 마을 등 가릴 것 없이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샤틸리 성채는 천 년 고독을 안으로 삭히며 견고하게 서 있다.
성채 사이로 먼지가 묻어 하얗게 퇴색한 구불한 길이 이방인을 안내한다. 마을 주민들이 성채 일부를 호텔로 개조해 이용하고, 뒤쪽 언덕에다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목축과 양봉으로 살아가는 샤틸리 마을 사람들. 샤틸리는 여름 한철과 짧은 가을 초입만 여행과 트래킹을 허용해 관광객에게 문을 열어준다. 마을 주민 일부분은 겨울이 오기 전에 샤틸리를 떠났다가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 혹독한 겨울을 고립된 채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피로를 풀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호텔이 우리 화폐로 오만 원 정도면 이용 가능하다. 천 년 고성에서의 하룻밤 이용료가 이 정도면 이방인에게는 엄청난 행운인 셈이다. 조지아인도 쉽게 찾아오지 못하는 숨어 있는 중세의 비경. 이곳에서는 시간을 가르는 바람소리와 함께 하는 고독의 끝자락을 즐기는 일이 남아있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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