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조지아를 찾은 러시아 작가 푸시킨, 톨스토이, 고리키(2)
한순간 무의식 속에 있었다
칼날 같은 그리움이 깊게 파고들었다
그것이 잠일 수도 있었는데
깨어나는 순간 술을 찾았고 음악을 찾았다
머플러는 뒹굴다 지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누워있었다
나는 그보다 더 창백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바람이 들녘에 쓰러져있다
별 몇 개 잎이 다 떨어진 나목에 걸쳐있다
쓸쓸한 영혼이 쓸쓸한 영혼에게 말을 건넨다
검은 새 떼를 지어
가는 달을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너의 손을 잡아 가슴에 얹는다
노을이 스멀스멀 산을 넘는다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 영혼의 끝에 다다른다
아, 그렇다 그 날이 그렇다
(한희원의 시 -쓸쓸한 영혼이 쓸쓸한 영혼에게- 전문)
내가 조지아에는 봄에 왔다. 겨울 초입에 귀국했으니 본격적인 조지아의 겨울을 지내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가을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부 산악지역인 우쉬굴리의 산길과 평원을 거닐며 서늘함을 미리 경험해 보고 앞으로 밀려올 혹독한 겨울을 예감했다. 아직은 오지 않은 겨울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냉기를 몰래 품은 채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백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산 아래의 마을과 만추로 변한 산언덕의 나무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노오란 나뭇잎들이 바람을 못 이겨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그리움이 깨어나 춤을 추었다. 죽었던 혼들이 일어나 춤을 추는 정경을 작곡한 프랑스 음악가 카미유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이러했을까.
몇 해 전 몽골에서 바이칼까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사막에서 밤을 새우며 세상의 모든 별들을 다 본 것 같았다. 평원의 끝과 끝이 별들로 채워져 있었다. 별 하나 하나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기며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별! 별들의 눈빛이라니. 울란바토르에서 침대 열차를 타고 26시간 만에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을 보며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새긴 별들을 숲속에 하나씩 던졌다. 조용히 칼날 같은 그리움이 사그라졌다.
이르쿠츠크의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가면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트루베츠코이 공작의 부인이 세 딸과 함께 묻혀있다. 러시아를 사랑하고 애국심에 불탔던 젊은 장교이자 데카브리스트였던 트루베츠코이 공작. 그는 장래가 창창한 황실 근위대 장교였다. 왕정에 대항하는 쿠데타가 실패한 뒤 주동자 5명은 처형되고 106명은 동토의 땅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들은 유배지인 이르쿠츠크에서 예술의 꽃을 피웠다.
데카브리스트 중 18명은 결혼한 상태였다. 그중 11명의 부인들은 안락한 귀족의 생활을 버리고 혹독한 동토의 땅 시베리아로 떠났다.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트루베츠카야가 가장 먼저 남편에게로 갔다. 부인은 시베리아에서 28년을 보낸 뒤 남편이 사면받기 두 해 전에 숨졌다. 실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이르쿠츠크에는 톨스토이 작품 의 주인공인 안드레이 발콘스키의 실제 모델이었던 세르게이 발콘스키와 그의 아내 마리아 발콘스카야가 살았던 집이 있다. 마리아 발콘스카야는 1812년 러불전쟁에서 나폴레옹군대를 격파한 니콜라이 라예프스키 장군의 딸이다. 지금 그들의 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세르케예비치 푸시킨(1799~1877)은 혁명가 데카브리스트들의 젊은 부인들을 위해 시를 썼다. 푸시킨은 스스로 데카브리스트의 운명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인들은 푸시킨을 '우리의 모든 것'이라 표현하며 그를 사랑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그의 문학적 위상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를 뛰어넘는다. 다만 번역하기 힘든 그의 글을 외국의 대중들이 쉽게 읽지 못했을 뿐이다. 젊은 시절 외무부에서 번역관으로 일한 푸시킨은 당시에 혁명을 지지하는 인사들과 교류하며 진보 문학모임에 참여하며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와 은 저항시로 차르 체제하의 러시아 사회를 비판하는 시이다.
황제들이여, 이제 배우라.
형벌과 포상,
강목과 재단, 그 어느 것도
그대들의 믿음직한 방책이 되지 못함을.
미더운 법의 보호아래
먼저 고개 숙이라,
민중의 자유와 평안이
왕관의 영원한 보초가 되리라.
-푸시킨의 시 '자유' 일부 박형규 옮김 써네스트 2009-
푸시킨은 1820년 차르 정부에 의해 남부 흑해 연안으로 추방당한다. 외무부 소관이어서 전근형식의 추방이었다. 데카브리스트의 냉혹한 시베리아 유배는 아니었다. 그의 남부로의 추방은 운명적으로 카프카스와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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