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길을 걷다고요하다
나무가 쓰러졌다
새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문득
소리 없이,
소리죽여 말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 해낼 수 없다
사라져 가고 있다
영혼의 가는 끈이 팽팽해진다
아. 바람이, 별이, 나무가
우는소리
그것이다
고요의 언어!
(한희원의 시 '고요의 언어'- 전문)
긴 항해를 마친 기분이다. 2019년 11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첫 연재 글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썼다. 이른 봄 조지아에 도착해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겨울에 이르러 귀국했다. 아무도 모르는 이국땅에서 혼자 생활하니 조지아에 적응하기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고립되어 가는 심정이 더 강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아는 사람도 없이 지내다보니 나라는 사람은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신세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외로운 시간도 느리지만 흘러가고 지나간다. 이러다가 생의 막바지 순간까지 도달할 것이다. 외로움이 짙었던 시간일수록 그리움 또한 배가 되는 것 같다.
이방인의 눈으로 처음 본 이국의 거리를 거닐고 그들의 생활을 바라보았다. 가난하지만 낭만적인 사람들. 따뜻한 빛의 가로등이 켜질 때면 곳곳에서 버스킹을 하는 생의 연주자들. 족히 80은 넘었을 것 같은 노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에 영혼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생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걷고, 부딪치고, 울음을 삼켰던 거리와 눈빛들이 생각난다.
매일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 무렵에 뚜벅뚜벅 홀로 걸으며 므트크바리강 다리 위에 서서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던 일상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돔' 레스토랑에 앉아 조지아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말없이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일. 유일하게 눈인사를 했던 수백 년은 됨직한 나무 옆에서 낡고 먼지 묻은 탁자 위에다 과일을 놓고 파는 노점상 부부. 숙소 앞에 있는 작은 상점의 무심한 아가씨. 벼룩시장 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매력 넘치는 게오르기 아저씨도 그립다. 백번을 넘게 드나들었지만 눈인사조차 건네지 않던 무뚝뚝한 화방 여주인도 많이 보고 싶다.
고국으로 귀국해 코로나를 경험하고 있다. 조지아에서의 고립을 마쳤는데 또 다른 고립과 맞닿았다. 조지아에서도 코로나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와 마음이 안타깝다. 높은 산과 들녘, 아름다운 강이 있어 공기가 좋은 나라이지만 의료수준이 빈약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의식 탓에 코로나가 더 심한 것 같다. 지금은 더더욱 갈 수가 없어 불쑥불쑥 올라오는 심한 향수로 인해 마음에 생채기가 난다.
지난 여름에는 트빌리시에서 작업했던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고 생애 첫 시화집 '이방인의 소묘'를 출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무등일보에 63편의 글과 그림을 올렸다. 글을 쓰면서 그곳의 생활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간절히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트빌리시를 찾게 되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홀가분한 여행자로 지내고 싶다. 와인에도 취해보고 고봉을 향한 거친 트레킹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지면을 할애해준 무등일보와 편집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서툰 글을 잘 봐주신 분과 독자들께도 지면을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린다. 힘들게 연재를 이끈 나에게도 토닥토닥 격려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작지만 아름답고 용감한 조지아에 위로를 보내며 무탈하기를 소망한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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