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 새벽, 법원에 난입해 건물을 깨부수고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며 여성 판사의 이름을 호명한다. 사상 초유의 법원 폭력 사태에 여당 의원들은 '폭력은 안 된다' 면서도 '폭력의 책임을 시위대에 일방적으로 물을 수 없다'고 두둔했다. 서부지법 사태는 일종의 결합이다. 그간 극우와는 거리를 두었던 보수정당이 그들을 적극적 지지층으로 결탁하게 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보수의 새로운 지지층으로 떠오른 2030 남성들과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일부 기독 극우세력들의 부상이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대구 탄핵 반대 집회에서는 약 2만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여 2002년 월드컵 이후 최대 인파라고 말한다.
9일 광주 금남로에서도 이들의 탄핵반대 집회가 진행되었다. 진행자는 '광주폭도 히사시부리(일본어로 '오랜만이야'라는 뜻)' 라고 인사한다. 집회 장소는 전일빌딩 앞 도로였다. 그곳은 1980년 5월 21일 집단 발포가 일어난 곳이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제도라고 하지만, 타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광장은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하고 저들도 시민으로서의 기본 주권이 보장된다. 민주주의의 딜레마다.
이대남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오고 간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극우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가 극우 포퓰리즘의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좌파정권이 권력을 잡았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세대,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았던 세대, 그럼에도 왜 청년 남성들은 극우화되었는가, 왜 그들의 주 지지층이 되었을까, 빈곤은 극우의 사회적 조건 중 하나다. 더 정확하게는 불평등과 격차가 민주주의를 왜곡한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24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1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15~29세 청년층의 고용률은 45.3%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0.8%p 하락한 45.5%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실업률은 5.5%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0.2%p 상승했다.
15~64세 고용률(OECD 비교기준)이 69.9%로 지난해 같은 달 대비 0.3%p 상승하고, 실업률은 2.2%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0.1%p 하락한 것에 비해 청년층의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으로 파악됐다. 통계청은 이를 두고 '사용자와 노동자 간 요구의 불균형'을 원인으로 분석했으나, 전체적인 고용의 질이 너무 나쁘다. 여전히 36시간 이상 취업자는 23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주당 평균 취업시간 역시 38.8시간으로 23년과 비교하여 0.4시간 감소했다.
일을 해도 가난하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없으며 결국엔 구직단념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비경제활동인구 중 사유 없이 쉬고 있는 이른바 니트청년은 40만 명을 넘어섰다. 청년층의 사회적 고립, 동시에 청년층의 온라인 커뮤니티 유저 가입수가 증가할수록 니트청년의 비율은 비례하여 올라간다.
이는 자연스레 극우 현상의 또 다른 원인인 '공동체의 부재'로 이어진다. 관계를 맺는 것에는 늘 비용이 든다. 인간관계는 무료가 아니다. 돈과 시간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의 힘이 있어야 한다. 만날 수 있는 여력, 안부를 물을 여력이 있어야 관계를 맺는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사람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고,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지출부터 줄인다. 문화생활, 여가 그리고 인간관계다. 이렇게 곁을 두는 것이 어려워지고 스스로를 고립하고 인터넷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의 인간관계는 비용, 즉 마음의 힘이 들지 않는다.
곁을 두는 것이 어려워졌고 조롱하고 개인화하고, 혐오하는 것은 쉽다. 쉽게 후자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직접 대면했을 때와 멀리서 관망할 때 관계 맺기 방식은 다른 양상을 띈다. 온라인을 통한 관계 맺기가 오프라인보다 힘이 약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청년층 내부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양상이 다르다. 그것은 언어와 집단행동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유무 차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통을 구조의 문제로 발화하고 이를 통해 해결책을 요구하는 집단행동, 남성들에게는 이 경험이 부족하다.
젠더를 떠나, 한국 사회는 '친구'에 대해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이 있다. '친구 많이 사귈 필요 없다', '의존하면 안된다' 등의 말들이 통용되는 사회다. 나는 우리 세대를 '공동체 빈곤의 세대'라고 표현하고 싶다.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은 동시에 언어도 부재하다. 정확히는 공동의 언어가 없다. 오로지 개인을 향해, 평가하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법원에 난입한 이들을 보며 본인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느끼는가? 국가폭력을 정당화하고, 군부독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대한 통쾌함을 느끼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왜냐, 이는 2030 남성 전체로 일반화할 수 없는 일부 '극우 행동대장'들의 행위는 개인의 분노 표출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명확히 상징화되었을 뿐이다. '요새 젊은 남자애들은 극우래'라는 말로.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렇기에 아직은 압도적인 수의 남성들이 이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극우 폭동으로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 것, 마음속 깊이 내재된 분노는 사실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무의식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극우남, 이대녀, 응원봉녀, 이대남 이라는 단어들로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가? 몇 단어들로 납작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우리 세대의 공통의 문제들과 사연들이 저마다 있다. 마치 백수, 구직자, N포 세대, MZ 세대 라는 말로 우리가 구조적으로 겪는 고통들이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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