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칼럼] 선택의 빛과 그늘

@김치원 운남고 교사 입력 2022.10.04. 11:31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의 말이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는 베테랑 영어교사의 고민이다. 선생님은 영어수업 보다 교육학수업을 준비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씀하시면서, 수업시간 마다 영어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고 하셨다. 입시와 관련 없는 수업을 듣지 않으려는 제자들을 붙잡고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이제 고교 현장에서 낯선 모습이 아니다. 요즘 고등학교 교사들은 교육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보건, 때로는 논술과 환경까지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교사들이 자신의 전공과 다른 과목을 가르치게 된 것은 2015개정교육과정에 선택과목 편제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고교 2,3학년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과목들을 듣게 되는 이른바 선택과목 중심의 교육과정을 적용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특정 과목을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2년 동안 그 과목을 듣지 않아도 졸업을 할 수 있다.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은 과목 교사들은 해당 학년도에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교양과목을 가르치거나, 겸임을 나가거나, 심지어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가기도 한다. 2025년부터는 고교학점제의 전면 도입으로 이러한 문제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에는 고등학교 근무를 기피하는 교사들도 많아지고 있다.

물론 선택과목 중심 교육과정에 이점도 많다. 학생들의 개별적 관심사나 진로를 고려하여 개인 맞춤형으로 교육과정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영어를 잘하면 문과를, 수학을 잘하면 이과를 가라는 식의 전통적인 진로상담을 받았던 필자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분명 멋진 시스템처럼 보인다. 선택 과목을 일반선택과 진로선택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교과(군)의 내용을 심화시키고 다양화한 점도 좋은 점이다. 영어 과목을 예로 들자면 영어독해와 작문, 영어회화와 같은 일반선택 과목들과 영어권 문화, 영미문학읽기, 진로영어와 같은 것들이 있다. 교육선진국이라고 추앙받는 핀란드, 프랑스, 미국 등의 나라들이 학생들의 과목선택권을 전적으로 보장해 주는 고교학점제를 안정적으로 실시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선택 중심의 교육과정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나라의 평가제도가 시대를 좇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교학점제를 운영하는 국가들은 절대평가제도가 안착되어 있다. 일정한 성취기준에 도달하면 해당 과목을 이수한 것으로 보고 학점을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진로선택과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이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누어지는 상대평가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상대평가제도 안에서는 학생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9등급을 받게 운명 지어져 있다. 결국 학생들은 성취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9등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공부한다. 아무리 미화를 해서 표현을 한다고 하더라도 공부의 목적은 친구들 보다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함이다. 혹자들은 진로선택과목은 절대평가제로 운용되기 때문에 등급 경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상위권 대학들은 진로선택과목의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22학년도 서울소재 33개 대학 학생부교과 전형을 분석해 본 결과, 17개 대학이 진로선택과목 성적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나마 절대평가제의 장점을 살려 정성적으로 반영을 하는 대학은 2개 대학 뿐이다.

내신과 수능 대부분이 여전히 상대평가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얼마나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성장 가능성을 평가한다고 하는 학생부 종합전형 조차도 대학의 지원 가능범위를 가늠할 때에는 여전히 내신 등급이 중요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의 선택은 교육과정을 설계한 사람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흥미나 적성보다는 이른바 '널널한 과목'에 몰리게 된다. "선생님, 지금 몇 명 신청했어요? 2등급까지 몇 명이나 나올까요?" "이 과목 들으면 해야 할 것이 많을까요? 솔직히 수능에 나오는 과목 공부하는 것도 벅찬데, 왜 이 과목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학생의 관심사와 진로희망을 묻는 교사들의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명백한 답을 피하면서, 오히려 이렇게 되묻고는 했다.

우리 모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길을 걷고 있다. 길을 걸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좋은 길이라고 말하며 갈 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그 길을 어쩔 수 없이 먼저 걷고 있는 우리들은 길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지도와 나침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그 위험을 호소해 본다. 우리들의 목소리가 언제 그들에게 닿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우리들은 여전히 교육을 희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치원 운남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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