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원 입구에 들어서니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 바람에 실려 온 향기는 언젠가 맡았던 냄새다. 아련하게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기억하는 냄새를 재생하고 있는데 향나무 연필이 떠올랐다. 70년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 준 연필 냄새였다. 소년 시절 냄새의 기억까지 소환한 곳은 구례 광의면 천변길 ‘천개의 향나무 숲’이다. 절기상 입춘과 우수가 지났지만 여전히 꽃과 식물이 귀한 시기이라 방문객들의 발길은 없다. 다소 삭막한 분위기이나, 푸르른 상록수들은 생기가 돈다. 꽃 대신 향기를 맡고, 반짝반짝 빛나는 녹색 잎들이 만드는 겨울 정원의 매력을 느낀다.
나무 전지작업으로 봄을 준비하는 정원지기의 손길에서는 분주함이 전해진다. 정원지기를 돕는 외국인 노동자 2명도 바쁘게 움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정원지기가 이들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출신이라고 소개한다. 수더분한 인상인 이들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삿말을 건네니 더욱 정감이 간다. 카자흐스탄은 대부분 서구적 외모이나 우리 민족과는 가까운 나라가 아닌가.
1937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기차에 실려 한 달 만에 물설고 낯선 땅,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했을 때, 고려인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먹을 것을 내준 은인의 나라였다.

일제강점기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여생을 마친 곳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이고, 고려인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켜오고 있는 고려극장과 한국어로 발행하는 신문 ‘고려일보’가 있는 곳의 국민을 만났으니 반가웠다. 이들의 코리안드림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천개의 향나무 숲’의 주인공은 향나무이다. 카이즈카 향나무 등 728그루를 포함해 1천여 그루가 넘는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로 상록침엽교목과 소교목인 카이즈카 향나무가 있다. 눈향나무와 옥향은 나무의 크기가 낮고 뿌리가 여러개 줄기에서 나타나는 관목이다. ‘천개의 향나무 숲’의 나무들은 무성한 잎으로 꼿꼿한 수형을 유지하고 있고, 일부는 대지 위에 비스듬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떠한 난관과 장애에서도 꿋꿋하게 세월을 견뎌낸 불굴의 의지가 느껴진다.
향나무 숲에 펼쳐진 7천평의 대지의 캔버스 위에서 자연이 만들어낸 장면이 주는 울림이 크다.
향나무와 동반자가 되고 있는 섬잣나무와 은목서, 금목서 등이 함께 어우러진 녹색 세상은 생동감이 넘친다. 겨울철 삭막하지 않고, 잔잔한 힐링지로서 행복감이 크다. 이 나무들은 모두 연중 푸른 잎을 보여주는 상록수종들이기 때문이다. 나무들에서는 세월의 힘이 전해진다. 대부분 40~50년이 넘어선 나무들이니 수령뿐만 아니라 자태에서도 자긍심이 느껴질 만하다.

100년이 넘은 감나무 세 그루도 정원의 주류는 아니나, 또 다른 시간을 말해주는 증언자이다.
천개의 향나무 숲은 1970~80년대까지 백사장이었다. 섬진강 둑을 막은 이후 이곳이 과수원, 뽕밭, 묘목밭으로 바뀌었다. 땅의 변천이 나무와 관계가 있으니 비옥하고 배수가 잘되고 보습력이 좋은 땅임을 대지 위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반증하고 있다. “백사장을 묘목밭으로 바꾸고 수많은 나무를 키워낸 처음의 땅 주인은 선도 임업인이었다”고 정원지기는 평가했다.
이 정원의 향나무 숲은 70~80%가 자생종이고 15%가 외지에서 들여와 심겨진 나무들이었다. 70~80%가 묘목을 심어 지금의 상태이니,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을 이 땅에서 담고 있는 셈이다. 천개의 향나무 숲의 역사를 대변하는 자원이다.
천년의숲 정원지기는 안재명 대표다. 구례 산동 출신인 안 대표는 중학교 졸업 후 대처에 나갔다가 31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안 대표는 농약 판매업을 하면서 곡성 출신 부인과 함께 예쁜 농장을 갖고 싶어 했다. 동경은 아니었지만 발길이 움직여졌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한다. 부부가 농촌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흙과 나무에 마음이 갔다. 그러던 중 15년 전 묘목밭인 이곳을 알게 됐고 땅주인과 적정한 거래를 통해 구입했다. 당시 인수인계를 받은 묘목밭에는 향나무가 80~90%를 차지했다. 향나무는 70~80년대 부의 상징이었다.
향나무는 아마도 묘목밭 주인에게도 많은 부를 안겨줘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기였던 시기였기에 대한민국 평균인들의 로망은 마당 가진 집 한 채 짓고 향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었다. 향나무가 늘 불티나게 팔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향나무 시장은 특수를 구가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 잔재 청산론이 불거져 죄 없는 향나무는 베어내고 잘리는 오욕과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나무는 죄가 없는데 국민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향나무가 일본 수종이라고 해서 오욕을 겪었습니다. 수백 년을 지켜온 나무들이 이런 식으로 없어져 아쉬웠습니다.” 없어서 못 판 향나무를 찾지 않으니 땅에 묵혀질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상황에 요동치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한 험한 시간을 보낸 나무에는 세월이 담겨있다. 나무에서 풍기는 기품도 남다르다.

향나무 숲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입구의 은목서이다. 실상은 10그루인데 한 그루처럼 보인다. 50년 이상 된 10그루는 최고 높이 7~8m, 폭 12m 정도에 달할 만큼 웅장하다. 10월 초 은목서꽃이 필 때 나무에서 뿜어대는 은목서의 은은한 향기는 방문객들의 찬사를 받는다. 초화류는 향나무 숲의 포인트를 주고 있고, 군데군데 낯설지 않은 세련된 조형물이 얘깃거리를 만들어준다. 천개의 향나무 숲은 2020년 전남도 민간정원 제14호로 등록됐다. 인위적 요소가 거의 없이 자연적인 모습을 유지, 정원 전문가뿐만 아니라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좋은 공간은 지역을 담아내는 그릇이다”고 평소 강조하는 안 대표는 지역의 문화와 상품들이 향나무 숲에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향나무 숲에서 플리마켓을 세 차례 열었고, 지역 내 다른 민간정원들과 연계한 3색정원 축제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었다. 안 대표 부부는 지역 노인들을 위한 특별한 가든파티를 열었다. 향나무 숲을 무대로 열리는 가든파티는 늘 땅과 살아온 어르신들을 주인공으로 깜짝 이벤트였다. 격식을 갖춘 특별한 드레스코드는 없었지만, 전문 사진작가가 곱게 차려입고 외출 나온 노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꽃을 들고 활짝 웃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인생 사진을 선사한 것이다. 어쩌면 꽃을 들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영정사진으로 쓰이면, 천상으로 소풍을 떠나는 고인을 환송하는 조문객들과 추억을 공유하는 기쁜 장례식이 되지 않겠느냐는 부부의 소박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돌아보면 예정된 길이었습니다. 과정마다 고비를 넘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슬들이 꿰졌습니다. 15년 동안 정서적으로 성장했고, 공간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글사진=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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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오가며 왜군 격파··· 한산·행주대첩의 승부사
삼도수군사령부가 있었던 통제영(경남)통영)의 세병관(국보305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1차 진주대첩 등을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양 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운 보성 출신 선거이가 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해전과 육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8년 10월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선두에서 독전하다 적탄에 쓰러졌다. 최근 보성 선씨 문중에서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선거이 공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핀 순천대 이욱 교수의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본 호 집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선거이 등 5명의 보성 선씨 위패를 모셔놓은 오충사(전남보성).선거이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태어났다. 호는 ‘친친(親親)’이었다. 그의 효성이 남달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관은 보성이고 보성 조성에서 살았다.선거이는 최근 발굴된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79년 기묘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합격 당시 ‘겸사복(兼司僕)’에 있었다. 대통령 경호 부대 곧 최정예 금군(禁軍) 출신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무과에 합격한 후 그는 북쪽 국경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선거이는 무과 합격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무관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이 됐다. 이는 무예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승진이 빨랐음을 말해준다.선거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3월10일 진도군수에 부임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휘 능력이 검증된 실전 경험이 뛰어난 인물들을 경상, 전라 등 남해안의 지휘관으로 보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591년 2월 이순신이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가리포 첨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보임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도군수에 이순신, 선거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연이어 보임된 것은 진도가 왜구의 주된 공격 루트였던 것과 관계 깊다. 이순신과 선거이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유성룡이 무과 급제 후 인사차 들른 선거이에게 “전날 이순신을 보고, 또 오늘 그대를 보니 범장(范張)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했다.범장은 범식(范式)과 장소(張邵)을 가리키는 말로 깊은 우정을 빗댈 때 하는 고사이다. 서애가 이들의 관계를 범장에 비유할 정도로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던 이순신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그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책임을 지고 투옥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선거이가 옥을 방문해 위로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진도군수로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속했던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경상우수영을 지원하는 합동작전에 참전했다. 선거이가 한산도 해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다.김응남이 말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했다. …”정곤수는 말했다. “정운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가서 격파했다 한다.”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 수군의 요청을 받아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전라도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앞서 진무성 장군을 다룰 때 언급했지만, 이순신의 휘했던 송희립, 정운 등이 참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선거이도 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이는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다.호남·영암 수군이 견내량에 모여 왜적의 큰 배 중 10척, 중·소선 70여 척을 발견하고 접전했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을 쏘았으나 전혀 깨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 큰 바다로 퇴진해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군수 선거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난중잡록1, 임진년 7월한산도 해전에 참여한 선거이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로 선거이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임을 알려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해전에서 선거이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당시 수군 편제상 선거이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전라도 수군과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던 선거이는 전라감사 이광의 지원 명령을 받고 수원으로 이동했다. 전라병사 최원과 의병장 김천일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면서 이광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광은 진도군수 선거이에게 김천일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후 전라병사로 승진한 선거이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행주대첩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하지만 선거이 부대가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에서의 조선군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선거이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1595년 충청수사에 임명된 선거이는, 그해 5월에서 9월까지 약 115일 동안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무려 31일 이상 만났음이 난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1595년 9월 14일 선거이와 이별할 때 이순신은 다음의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북쪽에 갔을 때 함께 고생했고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 했네.오늘 달 밝은 밤에 술 한 잔 같이 하면내일은 이별의 감정을 느끼겠구려.한산도 이순신 장군 집무실에 해당하는 제승당.이순신은 선거이와 북의 여진족, 남의 일본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정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 24일 이순신이 공무로 보성에 갈 일이 있자 선거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이순신은 선거이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안타까워했다.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거이는 성을 비우라는 명군과 권율 등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을 나와 외곽 방어를 했다. 김천일 등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다.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공성 작전을 따르지 않았던 김천일의 실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성룡이 남인, 김천일이 서인으로 당색이 다른 것도 이러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공성 작전을 수행한 선거이에게 진주성 함락 책임을 물었다. 임진왜란 공신 책록에서 선무공신 아래 등급인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이순신과 3차례나 연합해전을 전개하고 육전에서는 일본군과 끈질긴 전투를 하고 마침내 전투의 선봉에서 지휘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영웅에 대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다. 고향인 보성에 선거이 등 보성 선씨 5인의 영정을 봉안한 ‘오충사’가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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