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책임도 뒤따라야 한다. 그 일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킬 만한 사안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책임을 물어 단죄하겠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책임지는 자세가 하나의 매듭이 되어, 참다운 미래로 가는 정화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 대한민국은 책임이 사라진 시대에 있다. 두루뭉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 정략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한다. 공분을 자아낸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진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뭉개고 간다. 이른바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전형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159명의 생때같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어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 된 것일까.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지 100일 하고도 열흘이 하염없이 지나간다. 그날의 아픈 상처는 핏빛이 되어 유가족들의 심장에, 국민들의 뇌리에 선명한데 아직까지 제대로 책임지는 이들은 없다. 유가족협의회는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성역 없는 진상규명 등 6개 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그 자리에는 난데없이 헌정사상 첫 국무위원 탄핵소추라는 논쟁거리가 등장했다. '참사 책임을 묻는 국민적 명령'이라느니, '이재명 방탄용 의회 폭거'라느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에 대한 조치는 여기까지 올 일도 아니었다. 재난안전 관리의 최고 책임자로서, 파면이나 해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진사퇴 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나마 유가족들에게 위안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버티고 뭉개다가 지금은 본인조차 옹색하기 짝이 없는 궁지에 몰렸다. 국가적으로도 헌재 심판 때까지는 진영 간 끝없는 소모전이 불가피하게 됐다. 세월호 참사 때는 가식적이나마 '대통령의 눈물'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찾을 수 없다는 푸념들이 쏟아진다. 모두가 책임 부재에서 비롯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성남FC, 대장동 백현동 개발, 대북송금 의혹까지 검찰의 수사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진영으로 갈린 여의도 정가는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정적을 죽이기 위한 검사 공화국의 횡포'라는 민주당 측의 주장과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제1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라는 국민의힘 측의 공방이 이어진다. 그 틈바구니에서 국민들은 질식할 것 같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수사 초기 이 대표가 측근들의 구속사태에 대해 엄중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국민들의 여론이 어땠을까라는 점이다. 유동규 구속 당시 '측근은 정진상·김용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라고 선을 그었던 이 대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작동한다 하더라도 정·김 최측근들의 구속 사태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국민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이 또한 뭉개기 아닌가.
지방행정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은 비일비재하다. 23년째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는 광주의 서방지하상가, 수천억대 혈세낭비 논란을 일으켰던 전남의 F1경주장 등이 무책임 행정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다. 비단 대형 프로젝트만이 아니다. 서민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행정의 난맥상은 오늘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지만 책임지는 모습은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광주에서 불거진 덕남정수장 단수 사태를 둘러싸고도 말들이 많다. 최악의 가뭄 속에서 시민들은 너나없이 절수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정작 정수장의 물 수만t이 흘러넘쳤다. 느닷없는 단수 조치에 2만8천여 세대 시민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런 낭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강기정 광주시장은 사고 발생 초기 '안타깝다'라는 말로 유감을 표명했다가, 이틀 뒤 대시민 사과를 했다. 사고 발생 시점으로부터는 나흘 만이다. 그는 "가뭄위기 극복을 위해 동참해 준 시민들께 큰 불편과 혼란을 드리게 돼 송구하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사고원인규명자문단을 가동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유사시설 점검과 노후 상수도관 정비도 약속했다. 타이밍이 다소 늦었지만 적절한 접근이다. 사안의 경중과 정무적 판단에 따른 메시지 수위 변화로도 읽힌다. 일각에서는 처음부터 통 크게 사과하고 시민들의 양해를 구했더라면, 과거의 단체장들과는 차별화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았을까라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사과 요구 여론에 떠밀리듯 나서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다는 얘기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책임감 있는 이는 역사의 주인이요, 책임감 없는 이는 역사의 객이다'라고 일갈했다. 리더들이 가져야 할 중요 덕목으로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후세에게 어떤 나라, 어떤 지방자치를 넘겨줄지 고민한다면 지금의 두루뭉술 풍조로는 곤란하다는 의미다. 책임과 권위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떠나, 리더들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대충 그래도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이 사회에 보편화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또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거듭 하는 얘기지만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구길용 뉴시스 광주전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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