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신념-타락한 신념 정면충돌…'돌풍' 일으킨다
류성훈 취재2본부장·부국장
지난 주말 이틀 동안 많은 양의 장맛비가 내렸다. 덕분에 골프와 트래킹 등 예정됐던 휴일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다.
대신, 모처럼 네 식구가 완전체로 모였다는 사실에 새삼 안락함을 느꼈다. 외식으로 토요일 점심을 해결하고 집 앞 마트에서 큼지막한 수박 한 통과 과자 몇 봉지를 골라 서둘러 귀가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후, 뭘 할까 궁리 끝에 얼마 전 큰아들이 구렁이 알 같이 아끼던 알바비를 모아 장만한 OTT(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 전용 이동형 스크린 앞에 앉았다.
그동안 못 봤던 영화나 볼 요량으로 채널을 뒤적였다. 눈에 띈 작품이 디즈니플러스의 '삼식이 삼촌'이었다. 베란다 문도 열기 곤란하고 습기도 높아 올 여름 처음으로 에어컨을 틀어놓고 나니 영화 보기에 더없이 쾌적한 환경이었다.
본격적으로 드라마 관림에 몰입했지만, 16부작 중 9부까지 보고 완주를 포기했다.
시리즈는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직전의 혼동과 격동의 시대를 관통했던 여러 인물의 욕망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역사에 반영됐는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삼식이 삼촌(송강호 분)이 어떻게 조정하는 지, 실패한 쿠데타의 진범이 누구인 지 등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극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한 사건에 머무르면서 지루함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도 내렸다, 그쳤다 하는 비 때문에 오전에 사우나만 다녀와 두문불출했다.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군만두와 짜파게티를 먹고 또다시 OTT 시리즈 찾기에 나섰다.
이번엔 넷플릭스로 옮겨 방대한 콘텐츠를 뒤적였다. 별 기대 없이 선택한 시리즈 '돌풍'은 전날 한차례 실패를 설욕하듯 첫 화부터 시선을 잡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압도적 몰입감과 강력한 정치 도파민을 안겨줬다.
'돌풍'은 세상을 뒤엎기 위해 초심을 잃고 타락한 대통령 시해를 시도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고 대통령을 실제로 살해해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 드라마다.
'타락한 신념'과 '위험한 신념' 사이의 선 넘는 현실 정치의 모순을 날카롭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자신의 신념과 욕망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정치인의 대립부터, 묘략과 계책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의 숨통을 조여 가는 내용이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부패한 정재계 권력을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 악이 돼버린 국무총리 역(박동호)을 맡은 설경구는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돌풍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단단함과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퇴로를 닫은 채 돌진해 공멸의 길을 택하며 스스로 제물이 돼 정경유착의 부패 사슬을 끊어내는 결말은 시원하지만 다소 허탈감도 남는다.
한때는 민주화 투사였지만 점점 탐욕에 눈이 머는 경제부총리 역(정수진)의 김희애는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훗날 선거판에서 실패하고 사모펀드를 운영하며 정재계 인물을 끌어모으는 남편 때문에 발목이 잡혀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다 결국 스스로 파멸의 무덤을 파게 된다.
그 틈 속에서 돈을 지키려고 정관계에 검은돈을 뿌리는 재벌, 공안검사 출신의 음흉한 야당 대표, 출세를 위한 야비한 검사, 정의로운 검사가 가세해 팽팽한 평행선을 유지한다.
이 거대한 스토리를 끌고 가는 두 축의 '뼈 있는 말' 속에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 현실이 우회적으로 녹아져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이 나라에 빛은 없습니다. 어둠이 더 큰 어둠을 상대하고 있을 뿐",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을 이기는 건 더 큰 거짓이다"는 박동호의 말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진보나 보수 진영을 동시에 비판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수진이 "눈 감으면 세상은 살짝 어두워지지만 사람들은 금방 적응한다"고 회유하자, 박동호는 "정권은 무너져도 나라가 무너지는 건 막아야 한다. 당신이 만드는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 되니까"라고 맞받아친 부분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렇듯 '돌풍'은 수시로 폐부를 찌르는 대사로, 의미를 재해석해야 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돌풍'에서는 진보나 보수, 여야 등 특정 진영 입장에서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극과 극으로 나뉘고, 정치적 이념이라는 깃발 아래 모인 팬덤정치를 일삼으며 '상대의 모든 게 잘못'이라는 위험한 고착 상태에 놓인 대한민국 정치에 돌직구를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돌풍'에서 박동호와 같은 다크 히어로의 등장은 현실 정치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국민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소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인과 자기희생을 결심한 정치인이 누구일지 한참을 고민해 봤다.
'거짓을 이기기 위해 더 큰 거짓을 하는' 다크 히어로형 정치인은 현 정치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보다 '진실만이 거짓을 이길 수 있다'는 당장은 답답하고 손해를 보지만 옳은 진리를 신념처럼 지니고 있는 올바른 정치 지도자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리즈 '돌풍'을 보며 돌풍처럼 일었다.
류성훈 취재2본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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