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공평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첫째 딸 주연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남동생도 사랑한다. 아버지는 남매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 주연의 생일파티 동영상 속 카메라 뷰 파인더는 줄곧 남동생에게로 향해있다.
할아버지는 남매에게 크레파스를 사주셨다. 주연에겐 12색 크레파스를, 남동생에게는 24색 크레파스를 선물했다. 당신도 물론 아버지처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시겠지만, 알록달록한 크레파스의 개수는 딱 두 배만큼 차이가 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양양'은 양주연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자 '양양(梁孃)'들의 삶이 담긴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감독이자 주인공인 주연이 가족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돼버린 고모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영화는 이른바 'K-장녀'로 여겨지는 주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광주에서 교직 생활을 한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가부장적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보단 가정적인 가장이 되리라 마음먹은 아버지. 그는 주연을 남동생과 동등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주연이 느껴온 사랑의 크기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자살한 고모가 있다는 가족의 비밀을 듣게 된다. 아버지에게 고모에 대해 다시 물어보지만, 왜인지 아버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큰 상처라는 이유로 언급을 회피한다. 주연은 자신처럼 맏딸이었던, 그리고 '양양'이었던 고모 양지영을 찾아 나선다.
얼굴도, 이름도, 말 한 번 섞어보지도 못한 고모에 대한 흔적을 찾아 떠나는 주연의 여정은 처절하고도 절박하게 느껴진다. 일련의 행보를 목격하고 있는 관객들은 생면부지에 가까운 고모에 대한 집착 같은 추적에 "그가 어째서 이토록 몰두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거기에 대한 주연의 답은 명쾌하다. 지영이 '고모'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수단이자, '나'라는 존재에게 유일성과 그 특별함을 부여하는 도구다. 첫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내뱉는 날까지 우리는 타인에 의해 끝없이 호명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름은 우리가 존재하고, 존재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기록과도 같다.
비참하게도 고모 양지영의 이름은 바닷속 깊은 곳에 잠겨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세 글자가 되고 말았다. 분명 어느 시절에 존재해 우리와 같은 땅을 밟고 틈에 섞여 살을 부대끼며 살았지만 그 누구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주연은 몇 달간 그 넓은 망망대해에 뛰어들어 가려진, 그리고 숨겨진 고모의 이름을 결국 세상에 밝힌다.
한 대(代)를 거듭한 고모와 조카의 만남은 흑백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뤄진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특성상 갑작스러운 애니메이션의 삽입에 몰입이 깨질 수도 있지만, 물리적 기록이 부족했던 과거의 고모와 상상 속의 조우를 그래픽으로 가능케 연출해 그 감동을 극대화한다. 특히 주연이 바닷속 잠겨있던 지영에게 한 손을 뻗어 해저로부터 함께 헤엄쳐나오는 장면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의 백미다.
대학 동기가 그를 똑 부러지고 당찬 학우로 기억했던 것처럼, 지영은 주연처럼 꿈과 희망, 그리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양주연 감독은 평범한 대학생 지영이 스스로 생을 단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단순히 가족의 아픔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모의 삶을 통해 여성들의 존재가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를 묻는다.
감독은 그 질문을 마주하며 새겨지지 않은 고모의 이름을 조부의 묘에 새기는 것으로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로써 주연의 아버지도 몇십 년간 마음 놓고 부르지 못했던 누나의 이름을 다시금 불러보며 지영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선물한다.
한 시간이 넘게 펼쳐지는 고모를 향한 주연의 집착은 모두가 알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고 잠겨있던 수많은 양양을, 김양을, 이양을, 박양을 위시한 여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해 뭍으로 꺼내 올린다. 40년 전 양지영이라는 여성의 존재를 각인함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거듭해 망각되는 지영들을 세상에 호출한다. '양양'은 잊힌 이름을 불러내고 기록하는 강렬한 선언이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 "침체된 지역 문화 회복 계기 되길" 지난해 12월 4일 탄핵 집회 참여한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들 계엄 이후 43일 동안 두문불출하며 검찰 조사 출석을 거부하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집행된 가운데 지역 문화계는 이에 대한 반가움을 나타내며 희망찬 미래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공수처가 15일 오전 10시 33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에서 내란 우두머리 등 혐의를 받은 윤석열 대통령을 체포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달 18일과 25일, 29일 세 차례에 걸친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은 바 있다.이에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속 시원한 반가움을 드러내고 있다.김병택 광주민족미술협의회 회장은 새벽부터 지켜봤다며 체포 소식을 환영한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광주민미협 회원들과 매일 밤 금남로 집회에 참여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피켓 만들기 자원봉사에 참여해왔다.그는 "너무나 환영하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어느정도 법과 원칙, 질서가 설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며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경제나 민생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문화계는 이미 초토화됐다. 침체된 문화계 행사들이 앞으로는 되살아나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말했다.상황을 지켜보느라 잠 한숨 못잤다는 임해정 토박이 대표는 체포영장이 집행되어 기분이 좋다가도 헌정 사상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은 처음이라 역사적으로 안타깝기도 하다고.임 대표는 "공수처가 구속영장을 신청할 것 같은데 국민의힘 일부 국회의원들이 한남동 저택 앞에 나온 모습, 끝까지 뻔뻔한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 등을 보면서 구속이 되고 헌재에서 탄핵이 인용될때까지 아직 끝난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도 있다"며 "그동안 '오월극'을 많이 해오면서 비상계엄과 계엄군의 폭력 등의 단어를 일상 속에 가지고 살아왔는데 지난해 12월 3일은 너무나 무서운 날이었다. 윤 대통령의 체포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달했다.고난영 광주연극협회 회장은 '속이 시원하다'는 말로 심정을 설명했다.고 회장은 "영장 집행 전 녹화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담화 영상은 어이가 없다. 국민 대다수가 계엄선포는 잘못됐다고 이야기 하는데 혼자서만 자기를 옹호하는 그 모습을 보고 망상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며 "공수처가 48시간 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 같은데 법대로 해서 구속이 됐으면 좋겠다. 내란을 일으켰으면 구속이 돼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정양주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고 강조했다.정 회장은 "광주전남 작가들끼리 있는 단체 채팅방에서도 '즐겁고 기쁜 일'이라는 반응이 속속들이 올라왔다. 며칠동안 비상계엄령과 탄핵 이슈로 인한 불면증을 앓기도하고 글을 쓸 때도 집중력이 떨어졌는데, 당분간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며 "오늘 일을 계기로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법을 새로이 모색해야 되며,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와 정치의 지형에 변화가 일어나는 데에 문인들이 더욱 노력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한재섭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사무처장은 다양성 영화의 활성화를 기대했다.한 사무처장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영진위의 지역영화활성화 사업이 지난해 완전히 폐지되고, 영진위 위원 선임 문제에서도 각종 논란이 끊이질 않는 등 독립·지역 영화의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느끼는 일들이 빈번했다"며 "체포 이후 정권이 교체될 시, 이러한 문제들이 개선되고 원상복귀가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김혜진기자 hj@mdilbo.com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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