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부재와 공동체 위기··· 벼랑 끝에서 근본을 묻는다

입력 2025.08.03. 17:28 조덕진 기자
[주필이 만난 사람] 철학자 김태완
철학자 김태완 박사(호남학연구원 특별연구원)이 혼돈의 시대에 변혁의 힘으로써 학문·인문학·지식인 등 사회지도층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최종 관문

책문은 임금이 국가 현안을 묻고

응시자가 이에 응답하는 제도로

인재의 철학·능력·시대정신 검증

많은 학문이 변혁적 사상에서 출발

고려 말 개혁사상 이었던 주자학도

조선시대 통치이념이 되면서 경직

기득권을 옹호하는 도구로 전락해

우리는 위세가 아닌 정신으로 빛나

우리의 위대한 유산은 공동체 정신

삼국시대부터 약자 보듬는 지혜


2004년 출간된 '책문, 이 시대가 묻다'가 12·3 내란 정국 후 20여 년 만에, 다시 대중의 부름 속에 서점가 베스트셀러로 소환됐다. 수백년 전 조선조 선비들의 대책이 21세기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가가 소수의 지배엘리트와 그 카르텔의 이익에 장악된 오늘, '책문'의 정신이 각별하다. 저자 철학자 김태완 박사를 만나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통찰을 톺아본다.

-'책문(策問)'이라는 낯선 소재에도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돼 그 자체로 화제였다. 20여년 만에 국민들이 왜 다시 '책문'을 찾는다고 생각하시는지.

▲'책문'이 다시 소환된 데는 우리 사회가 리더십의 부재와 극단의 분열이라는 공동체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시대가 던지는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 지식인은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지도자는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 지식인도 지도자도 부재하고, 주체적 시민으로서 성찰과 책임도 실종된 시대에 우리 자신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살펴보시는 것 같다.

-'책문'은 현대의 눈으로 봐도 매우 혁신적이다.

▲'책문'은 조선시대 인재를 선발하던 과거시험의 최종 관문이다. 임금이 당대 국가 현안에 대해 대책(策)을 묻(問)고, 응시자가 자신의 학문적 역량과 철학, 경륜을 총동원해 해법을 제시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지식 평가를 넘어, 지도자가 될 인재의 철학과 위기관리 능력, 시대정신을 검증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수많은 철학자, 이론 중에 율곡 이이를, 그의 '책문'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특별한 배경이 있으신지.

▲대학 시절 학문이 현실과 유리돼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 속에 율곡을 만났다. 심오한 철학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적 지혜로 승화시킨 율곡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책문'은 바로 그 지점,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지식인의 치열한 고뇌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다.

-율곡 이이가 대중에 익숙한듯싶지만 그 깊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율곡은 조선 최고의 지성을 갖춘 엘리트이자, 자신의 학문을 현실 문제 해결에 쏟아부은 위대한 경세가다. 그는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을 관념에 가두지 않고, 당대 사회가 직면한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를 개혁하는 실천적 지혜로 승화시켰다. 율곡에게 학문은 곧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경륜이었다. 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제 학문의 원형질이자, 지향해야 할 실천적 지성의 표상이다.

-동양철학의 두 거봉, 주자와 양명의 방대한 전기를 완역하셨다. 현대에 주자나 양명의 생애와 사상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자와 양명은 박제된 사상가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근본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류 정신사의 거대한 스승이다.

조선 시대 주자학은 학문을 넘어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시스템이었다.

요즘처럼 극단적으로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분열의 시대에,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주자학이 당대 재지 사족과 향촌 사대부 의식과 관련 깊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가 내재해 있다는 양명학은 시민 개개인이 주체가 되는 시민사회 의식과 맞닿아 있다. 이들 두 사상가는 이처럼 사회적 책임과 개인의 주체성이라는, 시대를 초월하는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지금 우리의 삶과 사회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아 그 현재적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주자-양명-율곡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사상의 흐름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철학적 지향점은 무엇인가.

▲주자, 양명, 율곡은 고립된 개개의 사상가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으로 살 것인가'라는 보편적 질문에 답하려 했던 위대한 정신들이다. 주자학이 우주적 원리와 인간 본성의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체계를 세웠다면, 양명학은 내면의 양심과 실천을 강조했다. 율곡은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을 조선의 현실에서 통합하고자 했다. 저의 지향점은 이 거대한 사상의 흐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로 바로 설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자 김태완 박사(호남학연구원 특별연구원)이 혼돈의 시대에 변혁의 힘으로써 학문·인문학·지식인 등 사회지도층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제도교육에서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을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세대에게 율곡 이이나 주자학, 양명학 등은 낯설고 고답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철학,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전승되어 온 낡은 가치관이나 관념을 타파하고 시대의 문제에 맞는 답을 모색하는 지적 활동이다.

주자학도 처음에는 시대 변혁 사상으로 출발했다. 주자학이 조선왕조 통치 이념이었다는 것 때문에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 이념으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지만, 고려 말 처음 도입될 당시 주자학은 사회를 바꾸려는 변혁의 학문이었다. 당시 고려의 젊은 지식인들은 주자학이 주창한, 지식인이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책무를 져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사회 변혁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의 여파가 종국에 조선 건국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주자학도 처음 한반도에 들어올 때는 낡은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운 역동적인 사상이었다.

-그간 주자학은 조선조 패망의 주범, 한국사회 폐단의 하나로 지목돼 온 측면이 크다.

▲많은 학문이 처음에는 시대 변혁적 사상으로 출발하지만, 통치 이념이 되면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타락하면서 학문도 변질된다.

주자학도 고려 말 부패한 고려에 대응한 신진사대부의 변혁사상이었지만 조선시대 통치 이념이 된 후, 본래의 정신을 잃어 갔다. 혁신적이던 비판 정신보다는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기득권을 지키고 정적을 공격하는 사대부들의 이념적 무기로 전락하면서 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

-저서 전반에 한국 정신사와 문화, 역사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식민과 사대에 찌든 보수 기득권이 봐야 할 것 같다.

▲우리 역사의 위대함은 영토의 크기나 군사력이 아니라, 그 정신적 깊이와 사회를 관통하는 도덕률에 있다. 유럽이 아직 신화와 설화가 역사와 뒤얽혀 있던 7세기에, 신라의 원효는 이미 고도의 형이상학적 철학서인 '대승기신론소'를 저술했다. 또 우리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빈민 구제 제도를 운영해 오고 있다.

국가에서 평시에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 때 백성을 구휼하는 등 아득한 왕조시대부터 이미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공동체적 책임감이 시스템으로 작동해 왔다.

우리 스스로 과소평가하거나 잘 모르고 있었을 뿐, 이처럼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고 개인의 삶을 확보하고 국가와 사회의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사회윤리적 의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서울의 강단을 떠나 광주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이적하시며 광주와 인연을 맺으셨다.

▲아이가 중등학교 진학할 무렵, 한국의 주입식 교육 현실에 깊이 회의하던 중, 인문 철학을 표방하는 광주 지혜학교를 만났다.

지혜학교가 내민 손길에 선뜻 화답한 것은 철학을 강단에 가두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오랜 신념의 발현이었다. 철학은 정답을 암기하는 학문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사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라 생각했다.

-'지혜학교' 학생들과의 철학 공부가 매우 흥미로웠을 듯하다.

▲매우 흥미롭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질문을 던졌고, 기성세대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근본부터 되물었다. 고전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그들의 눈높이에서 철학적 개념을 풀어가는 과정은 저 자신에게도 큰 배움이었다.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저의 철학을 더욱 생동감 있고 현실적인 언어로 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 위대한 사상가들의 삶과 철학을 연구해 오셨다. 그 모든 지적 여정을 통과한 지금, 선생님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인생의 책문'이 있다면 무엇인지.

▲나의 학문은 이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가닿았으며,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지혜를 남길 수 있는가. 나는 평생 연구한 성현들의 가르침대로,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지행합일'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것이 평생을 두고 답해야 할 저 자신의 '책문'이다.


철학자 김태완은…

시대의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고전에서 길어 올리는 철학자다.

김태완(호남학 연구원 특별연구원)은 공동체 윤리와 지배층의 책무를 강조하며 조선 사회를 '상호 책임의 사회'로 재해석하는 등, 우리 사상에 대한 통념을 깨는 날카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고전 학자의 삶을 묵묵히 실천하며, 혼돈의 시대에 필요한 지식인의 자세와 리더의 조건을 묻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철학자라는 평을 듣는다.

경북 봉화 태생으로 숭실대에서 학부 와 석사를 마치고 율곡 이이의 책문을 텍스트 삼아 실리사상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강단에서 동양철학, 한국철학 등을 강의하다 2012년 광주 지혜학교의 철학교육연구소장을 맡은 후 광주를 거점으로 연구와 저서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책문', '율곡문답', '경연, 왕의 공부', '우화로 떠나는 고전산책', '고전의 숲'등이 있고, '주자평전'(수징난 저), '양명평전'(수징난 저), '성학집요'(율곡 이이 원전 번역), '토정유고'(이지함 원전 번역) 등의 역서 등 수십여권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책문, 이 시대가 묻는다'는 2004년에 출간 당시 그해의 주목할 만한 인문서로 선정되는 등 당시 인문출판시장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됐다.

각각 5년여의 시간을 쏟아부은 '주자평전', '양명평전' 번역·저술은 동아시아 정신사의 거대한 두 기둥을 우리 시대 언어로 복원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주자평전'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율곡 사상 연구로 율곡학술대상을 수상했다.

조덕진기자 mdeung@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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