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도로·실금·건축 그림자 등
도시 구성하는 요소들에 집중
비일상적 색감·추상적 묘사에
타르 등 사용해 새로움 추구
"동시대 미술 도민에 선사"

우리가 매일 차나 자전거를 타고, 혹은 걸어다니는 길에는 도시의 시간이 담겼다. 보도나 차도의 크랙이나 몇 번이나 덧칠해진 노면 표식, 차 선 등이 그렇다. 우리는 이것들에 큰 관심이 없다. 도시에 어떤 건물이 허물어지고 또 어떤 건물이 새로 들어오는지, 어떤 도시가 화려하고 예쁜지 혹은 어떤 곳이 내게 여유와 쉼을 주는 풍경을 가졌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도시는 새로운 감동이나 편안한 휴식을 주기보다 일상이 펼쳐지는 배경에 가깝다. 우리는 그 위를 오가며 도시의 시간을 무심히 지나친다. 벨기에 작가 쿤 반 덴 브룩은 우리가 배경으로만 소비해온 도시의 표면을 전면에 끌어올리며, 보는 방식을 다시 묻는다.
이같은 질문을 던지는 쿤 반 덴 브룩의 개인전이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다.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개인전 ‘지구의 피부’로 지난 7일 오픈, 7월 19일까지 진행한다.
쿤 반 덴 브룩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미술계에서 중진으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회화로 석사 과정을 밟은 그의 작업은 항상 도시를 향해 있다. 그러나 하늘에 닿을 듯한 마천루, 반짝이는 네온사인 야경 등이 아닌 우리의 시선에서 비껴나 있는 도로나 보도, 교차로, 주차장, 연석이나 건물 벽의 실금, 땅에 비쳐진 건축물의 그림자 등이 화면을 채운다.
이같은 도시 모습은 미국 LA·뉴욕·라스베이거스 뿐만 아니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일본, 쿠바, 한국 서울·제주 등 세계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직접 촬영한 사진에서 나온다. 작가는 사진에 담긴 모든 풍경을 화면에 그려 넣기 보다는 자신의 시선을 이끈 형상만을 남기며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작품들은 대부분 현실의 색을 따르지 않는 강렬하거나 비일상적인 색감을 건조하게 사용해 낯선 감각을 만든다. 어떤 작업은 도로 공사 현장에서 실제로 쓰이는 타르나 노면 표식용 도료를 사용하며 새로운 회화 기법을 취하기도 한다.
현재 작가는 이번 도립미술관 개인전을 위해 지난 1일부터 한국을 방문, 미술관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전남 지역에서 바라본 다양한 도시 풍경을 미술관 벽면에 드로잉으로 계속해서 남기고 있는 것. 이같은 작업은 9일 떠나기 전까지 지속 될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는 광주와 제주를 방문할 계획이다.

이번 전시는 그의 1990년대 초기 작업부터 최근 작업까지 총 61점의 회화와 드로잉으로 꾸려져 그의 작업 일대기를 만날 수 있다. 전시는 그가 주목한 이미지와 화면에서 느껴지는 물질의 흐름에 따라 총 다섯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섹션 ‘도시의 장면들’은 연석과 차선, 그림자 등의 도로 요소를 통해 도시 구조를 바라보는 작품들로, 두 번째 섹션 ‘도로의 이미지들’은 ‘Dead End’ ‘The Edge’ 연작을 통해 건축의 일부와 도로가 추상적으로 전환된 작업으로 꾸려졌다. 세 번째 섹션 ‘균열의 풍경’은 도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확대해 바라보며 도시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들여다보고 네 번째 섹션 ‘이미지와 개입’은 존 발데사리와의 협업 작품인 ‘This is an Example of That’ 등 영화 스틸 이미지에 색면과 선을 더한 작업과 다양한 물질을 사용한 작업을 만난다. 다섯 번째 섹션 ‘지구의 피부’는 그가 남겨온 다양한 사진과 작업 노트, 인터뷰 영상 등 아카이브로 꾸려진다.

이지호 도립미술관 관장은 “매년 우리 미술관은 도민들에게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며 “쿤 반 덴 브룩은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로 마침 한국의 도시 모습에 관심이 많아 전남으로 초대하게 됐다”고 이번 전시 배경을 밝혔다.
이어 이 관장은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가 전시장에 상주하며 전남의 모습을 전시장 벽면에 드로잉하고 있어 살아 숨쉬는 전시로 기대된다”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국제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온 그의 작품을 전남에서 전시할 수 있어 뜻깊고 많은 분들이 전시를 보고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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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오가며 왜군 격파··· 한산·행주대첩의 승부사
삼도수군사령부가 있었던 통제영(경남)통영)의 세병관(국보305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1차 진주대첩 등을 ‘3대첩’이라 한다. 이 가운데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등 양 대첩에 참전해 공을 세운 보성 출신 선거이가 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해전과 육전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1598년 10월 울산성 전투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선두에서 독전하다 적탄에 쓰러졌다. 최근 보성 선씨 문중에서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선거이 공적이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이순신 장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살핀 순천대 이욱 교수의 글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본 호 집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선거이 등 5명의 보성 선씨 위패를 모셔놓은 오충사(전남보성).선거이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태어났다. 호는 ‘친친(親親)’이었다. 그의 효성이 남달라 붙여진 이름이다. 본관은 보성이고 보성 조성에서 살았다.선거이는 최근 발굴된 ‘기묘문무과방목(己卯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79년 기묘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합격 당시 ‘겸사복(兼司僕)’에 있었다. 대통령 경호 부대 곧 최정예 금군(禁軍) 출신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무과에 합격한 후 그는 북쪽 국경에서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을 만났다. 선거이는 무과 합격하고 10년도 채 되지 않아 무관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절충장군이 됐다. 이는 무예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승진이 빨랐음을 말해준다.선거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3월10일 진도군수에 부임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휘 능력이 검증된 실전 경험이 뛰어난 인물들을 경상, 전라 등 남해안의 지휘관으로 보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591년 2월 이순신이 진도군수에 임명됐다가 가리포 첨사로, 다시 전라좌수사로 보임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도군수에 이순신, 선거이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연이어 보임된 것은 진도가 왜구의 주된 공격 루트였던 것과 관계 깊다. 이순신과 선거이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유성룡이 무과 급제 후 인사차 들른 선거이에게 “전날 이순신을 보고, 또 오늘 그대를 보니 범장(范張)이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했다.범장은 범식(范式)과 장소(張邵)을 가리키는 말로 깊은 우정을 빗댈 때 하는 고사이다. 서애가 이들의 관계를 범장에 비유할 정도로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던 이순신이 여진족의 공격으로 그 지역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이 책임을 지고 투옥됐을 때 같이 근무하던 선거이가 옥을 방문해 위로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진도군수로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속했던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경상우수영을 지원하는 합동작전에 참전했다. 선거이가 한산도 해전에 참전했던 기록이 선조실록에 있다.김응남이 말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했다. …”정곤수는 말했다. “정운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가서 격파했다 한다.”전쟁 발발 초기 경상도 수군의 요청을 받아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전라도 장수들은 머뭇거렸다. 앞서 진무성 장군을 다룰 때 언급했지만, 이순신의 휘했던 송희립, 정운 등이 참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선거이도 전쟁 초기부터 적극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이는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음에서 알 수 있다.호남·영암 수군이 견내량에 모여 왜적의 큰 배 중 10척, 중·소선 70여 척을 발견하고 접전했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을 쏘았으나 전혀 깨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 큰 바다로 퇴진해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군수 선거이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난중잡록1, 임진년 7월한산도 해전에 참여한 선거이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로 선거이가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임을 알려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한산도 해전에서 선거이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당시 수군 편제상 선거이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전라도 수군과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던 선거이는 전라감사 이광의 지원 명령을 받고 수원으로 이동했다. 전라병사 최원과 의병장 김천일이 수원에서 인천으로 진을 옮기면서 이광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광은 진도군수 선거이에게 김천일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후 전라병사로 승진한 선거이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고 외곽에 포진해 있었다. 행주대첩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하지만 선거이 부대가 요로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에서의 조선군 승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선거이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1595년 충청수사에 임명된 선거이는, 그해 5월에서 9월까지 약 115일 동안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 이 시기에 무려 31일 이상 만났음이 난중일기에 기록되고 있다. 1595년 9월 14일 선거이와 이별할 때 이순신은 다음의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북쪽에 갔을 때 함께 고생했고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같이 했네.오늘 달 밝은 밤에 술 한 잔 같이 하면내일은 이별의 감정을 느끼겠구려.한산도 이순신 장군 집무실에 해당하는 제승당.이순신은 선거이와 북의 여진족, 남의 일본과의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정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1596년 9월 24일 이순신이 공무로 보성에 갈 일이 있자 선거이의 집을 방문했다. 거기서 이순신은 선거이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안타까워했다.한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선거이는 성을 비우라는 명군과 권율 등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을 나와 외곽 방어를 했다. 김천일 등은 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했다.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공성 작전을 따르지 않았던 김천일의 실책이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성룡이 남인, 김천일이 서인으로 당색이 다른 것도 이러한 평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공성 작전을 수행한 선거이에게 진주성 함락 책임을 물었다. 임진왜란 공신 책록에서 선무공신 아래 등급인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됐다. 이순신과 3차례나 연합해전을 전개하고 육전에서는 일본군과 끈질긴 전투를 하고 마침내 전투의 선봉에서 지휘하다 장렬한 전사를 한 영웅에 대한 온당한 처사는 아니었다. 고향인 보성에 선거이 등 보성 선씨 5인의 영정을 봉안한 ‘오충사’가 있다. 한경국기자 hkk4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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