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사이 4’
1995년 1회 개막 후 광미공 등 반발
“5·18정신 희석화하려는 시도” 경계
순수민간주도 ‘광주통일미술제’ 선언
1천200개 만장 행렬 5·18묘역 길에
강연균 작가 주도 …시민 함께 뜻 모아
“소중한 역사이자 시민 자산 지켜내야”

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올해 31년을 맞았다. 광주비엔날레의 역사는 재단의 공식 기록뿐 아니라 예술가와 시민, 관계자들이 간직해 온 수많은 민간기록을 통해 함께 만들어졌다. 현재 광주비엔날레재단은 사진과 영상, 문서, 기념품 등 광주비엔날레와 관련한 민간기록물을 공개 수집하고 있다. 무등일보는 이번 ‘광주비엔날레 30년의 또 다른 유산’ 연재를 통해 민간기록에 담긴 광주비엔날레의 또 다른 역사를 살펴보고, 시민들이 간직해 온 기록의 가치를 조명한다. 편집자주
1995년 9월 21일, 광주 망월동 오월묘역(구묘역, 현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향하는 진입로에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오월묘역까지 약 3㎞ 되는 길 양쪽에 1천200개의 오색 만장이 휘날리고 있었고, 만장 행렬을 따라 들어간 묘역 주변에는 전국에서 참여한 250여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미술 행사의 공식 명칭은 ‘95광주통일미술제(부제:오월에서 통일로)’였으며, 영문 표기는 ‘ANTI GWANGJU BIENNALE’였다. 지금도 시민들은 이 행사를 ‘안티비엔날레’라는 명칭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9월 21일이라면,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대대적인 개막식을 치른 바로 다음 날이 아니던가? ‘단군 이래 한반도에서 열리는 최대의 문화행사’로 일컬어질 만큼, 당시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 최초의 비엔날레로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사회가 총력을 모아도 부족할 판에 ‘안티광주비엔날레’라니! 큰 잔칫상이 펼쳐진 마당에 통일미술제는 어떤 마음으로 ‘안티’라는 수사를 앞에 내걸었는가? 저간의 사정은 좀 복잡하다.
현재 광주비엔날레는 세계 5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국제적 위상이 높은 미술제이다. 그러나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1994년, 서울을 중심으로 국제 비엔날레 창설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을 무렵, 광주시는 우여곡절 끝에 개최지 선정의 물길을 광주로 끌어당기는 데 성공했다. 이때 광주시가 내세운 명분은 “5·18의 상처를 문화예술로 치유”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지역사회의 반발에 부딪힌다.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한 여론 수렴도 없이 행사를 추진하는 것은, ‘광주정신’을 희석화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냐는 경계심이 작동했다. 이 반발의 중심에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이하 ‘광미공’)가 있었다.

1994년 12월 행사 계획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듬해 봄까지 ‘광미공’은, 다각적 방식으로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 나갔다. 애초에 이들은 비엔날레 개최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닌, 행사의 형식 및 추진 절차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가 반년도 안 남은 상태에서 광주시는 이에 대응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결국 ‘광미공’과 지역 미술인들은 더 이상 광주시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전국 연합 성격을 가진 ‘광주통일미술제추진위원회(위원장 강연균)’를 결성, 그해 7월 ‘95광주통일미술제’ 개최를 공식 선언한다.
선언의 취지는 분명했다. 광주비엔날레가 “5·18항쟁 유발 책임자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점에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광주정신이 순치”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예향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광주정신의 형상화 작업의 면모를 전면적으로 제시하는 순수 민간주도 미술제”를 대안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언에 담겨 있는 엄청난 무게의 언어들을 통일미술제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들이 내놓은 답은, 바로 통일미술제 개최 선언과 함께 발표한 ‘만장 행렬’에 있었다.
‘만장(輓章)’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글귀로, 전통 장례에서는 깃발로 만들어 상여 뒤를 따르게 했다. 보통 고인을 잘 아는 지인들이 작성했으며, 만장을 써서 보내는 것을 가장 큰 부의(賻儀)로 여겼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다. 통일미술제는 이 전통장례의 만장을 끌어와 오월묘역에 펼치겠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시민 성금으로 해결했다. 당시 모인 성금만 6천만 원이었다.
2개월여 남짓의 시간, 지역 미술인들의 마음이 바빠졌다. 우선 전국 각 지역에 만장으로 사용할 천을 보내 한국사회의 여러 의제를 담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들 만장에 다양한 염원들을 담은 글귀가 쓰여 광주로 돌아왔다. 동시에 광주시민 및 각계 인사들에게 받은 글귀들은 ‘광미공’ 회원들이 600개의 만장에 하나씩 써나갔다. 이렇게 해서 만장 1천200개가 모였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광주 미술인들의 헌신이 결정적이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도 한몫을 했다. 7월 18일, 검찰은 5·18 책임자들에 ‘공소권 없음’ 결정을 발표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즉각 각계각층의 항의가 전국적으로 폭발했으며, 곧이어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만장 제작은 국민적 충격과 분노가 가장 극심하게 들끓었던 시기와 맞물렸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통일미술제의 동력에 불을 붙였다. 자연스럽게 만장에는 분노와 항의, 특별법 제정에 대한 열망과 염원의 표현들이 담기게 된다.
이렇게 국민 모두의 염원을 품고 완성된 만장 1천200개는 상여를 앞세우고 들어가는 오월묘역의 길에 세워진다. 작품의 이름은 ‘하늘과 땅 사이 4’. 이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강연균 작가의 작품으로 세워지지만, 사실상 제작 과정을 보면 시민과 미술인들이 힘을 합친 집단창작품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지금은 5월 상처의 치유를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라는 것, 아직 5·18은 끝나지 않았으며 여전히 ‘상중(喪中)’에 있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광주비엔날레가 품지 못했던 ‘광주정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광주비엔날레 민간기록물 수집을 홍보하는 글의 첫들머리에 통일미술제의 만장 행렬을 언급한 것은, 이 작품이 바로 이 같은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광주비엔날레의 또 다른 역사로 수집되고 기록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31년 전, 망월묘역 전체를 장지로 만들었던 ‘하늘과 땅 사이 4’는, 현재 강연균 작가의 작업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이 광주의 역사이자, 시민의 자산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수문장의 역할을 기꺼이 맡아왔다. 그래서 작업실을 여러 차례 옮기면서도 이 작품만큼은 잃지 않으려 온갖 애를 썼다. 다만 전체 만장 중 1개가 유실되었다는 후문이 들린다. 안타깝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만장이 이미 1995년에 사라졌다고 한다.
긴 시간 동안, 작품에도 작가에게도 켜켜이 세월이 쌓였다. 이제는 ‘하늘과 땅 사이 4’를 지키는 수문장의 역할을 광주가 맡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간 이 소중한 자산을 잃지 않으려 그 무게를 감당해온 강연균 작가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정경운 광주비엔날레 민간기록 수집 연구팀 팀장(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
[기고] 국경 건넌 진혼, 1회 비엔날레의 ‘경계’를 넘다
중외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와라비좌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 기념 특별공연1995년 9월 20일,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막을 올렸다. 광주가 세계의 미술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세계 각국의 작가와 작품들이 광주에 모였고, 전시뿐 아니라 각종 공연과 문화 행사가 함께 마련되었다. 광주비엔날레 창설 소식은 새해 벽두 바다를 건너가 재일한국인 미술 애호가 하정웅의 심장을 뛰게 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가로지르는 문화의 다리를 만드는 일”이었다.하정웅은 ‘두 조국’을 잇는 가교를 만들 단짝으로 일본의 민족가무단 와라비좌(わらび座)를 택했다. 와라비좌는 아키타현 다자와 호수 인근에 예술촌을 두고 일본 각지의 민속예능을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재구성해 온 공연단체다. 다자와 호수가 하정웅의 어린 시절이 깃든 장소라는 사실만으로도 하정웅과 와라비좌의 접점은 깊다. 그러나 그 접점은 장소적 친밀성 이상으로 각별하다. 그 인연은 다자와 호수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다자와 호수에는 ‘히메관음(ひめ觀音)’이라 불리는 관음상이 있다. 오랫동안 이 관음상은 수질 악화로 사라져간 물고기와 호수 수호신의 혼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정웅은 석연찮은 이 건립 배경 뒤에 은폐된 또 하나의 기억을 밝혀냈다. 발전소와 다자와 호수를 잇는 도수로 공사에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희생되었으며, 히메관음상은 이들을 추모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인근 사찰에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이어오고 있다.와라비좌는 해마다 열리는 ‘조선인 무주고혼(無主孤魂) 추모 위령제’에 함께했다. 1993년 8월에는 아시아 국제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된 한국의 무용가와 함께 진혼무를 선보였다. 한국의 현대무용가 이정희는 한국에서 가져온 흙을 뿌리고 살풀이춤을, 와라비좌의 아다치 마리(安達眞理)는 반주에 맞춰 진혼무를 추며 희생자의 혼을 달랬다. ‘한국에서 가져온 흙’은 상징적이었다. 일본 땅에서 죽은 조선인들의 혼 앞에 고향의 흙을 놓고, 그 위에서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단순한 친선행사만은 아니었다. 잊힌 죽음을 함께 기억하고 예술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는 공동의 진혼이었다.망월동 5·18묘역 을 방문한 하정웅과 와라비좌 극단 단원들.2년 뒤 광주비엔날레 창설 소식을 들은 하정웅은 와라비좌를 한국에 소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개방되기 전이었고, 일본 문화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도 여전히 강했다. 광주비엔날레 측도 처음에는 초청에 난색을 보였다고 하정웅은 회고한다. 그는 오히려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를 설득의 근거로 삼아 초청을 거듭 요청했다. 국경과 역사적 갈등을 넘어 서로의 문화가 만나는 일이야말로 비엔날레의 주제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하정웅이 보관해온 당시의 문서들은 이 과정이 말 몇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참가 검토 문서와 협약서에는 그의 제안이 협의와 설득을 거쳐 공식적인 국제교류 사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결국 와라비좌 광주 공연이 성사되었고, 하정웅은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이자 와라비좌 기념공연단 명예단장으로 양측을 연결했다.1995년 9월 28일 열린 와라비좌의 기념공연은 ‘조류를 타고(潮の流れにのって)’라는 주제 아래 일본 각지의 춤과 북, 민속예능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특히 ‘바다의 통곡’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는 진혼의 무대였다. 한국과 일본을 갈라놓으면서 동시에 이어온 바다는 이 공연에서 죽음과 애도의 기억을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었다.와라비좌의 광주 방문은 공연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월간 와라비’에 실린 광주비엔날레 방문기(하정웅)에는 공연단이 하정웅과 함께 ‘95광주통일미술제가 열린 망월동 오월묘역을 찾아 5·18 희생자들을 참배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연 후 와라비좌가 하정웅에게 보낸 팩스에는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망월동에서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보낸다는 문구와 함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일본어로 번역(부분 개사)한 노랫말이 적혀 있다.1995년 광주를 1993년 다자와 호수와 나란히 놓으면 두 장소 사이에 흥미로운 교차가 나타난다. 다자와 호수에서는 한국의 예술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혼을 일본 예술가들과 함께 위로했다. 2년 뒤에는 일본의 예술가들이 광주로 건너와 중외공원 야외무대에서 진혼의 춤사위를 추고, 5·18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만장 깃발 아래 서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물론 두 죽음의 역사적 원인과 성격은 다르다. 하나는 식민지와 전쟁기의 노동에 얽힌 역사고, 다른 하나는 1980년 5월 국가폭력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다. 이를 하나의 비극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두 장소에서 이루어진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상처가 남아 있는 장소를 찾아가 죽은 이들 앞에 몸을 세우고, 흙과 꽃을 바치며 춤과 노래로 기억하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하정웅은 단순한 공연 후원자나 문화교류의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자와 호수에서 잊혀가던 죽음의 기억을 찾아내고,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을 히메관음상 앞에 세웠으며, 다시 와라비좌를 광주로 연결해 중외공원과 망월동이라는 또 다른 기억의 장소로 이끌었다. 이 가교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기억, 죽음의 장소,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정웅은 ‘문화교류의 중개자’ 이상으로 서로 다른 기억의 장소를 이은 ‘기억의 문화예술 기획자’ 역할을 했다.1995년 와라비좌의 광주비엔날레 참가를 단순히 일본 민속공연단의 한국 초청으로만 기록한다면 이 사건의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 그것은 문화가 국경을 건넌 사건인 동시에, 한 장소의 기억이 다른 장소의 기억을 만난 사건으로 봐야 한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는 그렇게 전시장 밖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다. 다자와 호수에서 광주로, 히메관음상에서 중외공원과 망월동으로, 흙과 춤에서 꽃과 노래로. 사람들이 경계를 넘었고, 그들과 함께 기억도 경계를 건넜다.
- · [기고] 전문인력 육성, 이제는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이다
- · [기고] 해방 81주년, ‘일제청산 민족법정(가칭)’을 열어 단죄하자
- · [기고] 문헌이 담지 못한 시간, 사람의 기억이 채운다
- · [기고] 북미시장 견고한 수요 속 높은 국내 매출비중 '부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전남광주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