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5. 김개남

1894년 늦가을, 전라도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두 갈래의 거대한 농민군 행렬이 있었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주력군은 논산을 거쳐 공주로 진격했다.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은 남원을 출발해 전주와 금산·진잠·회덕을 지나 충청병영이 자리한 청주로 향했다.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는 흔히 공주 우금치 전투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교과서의 서술도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형성된 전선은 공주에만 있지 않았다. 청주와 보은, 순천과 광양, 나주와 장흥 등 곳곳에서 농민군의 항전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남원에서 청주로 이어진 전선을 지휘한 인물이 김개남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담양·곡성·구례 등 전남 동부로도 넓게 뻗어 있었다.
김개남은 1853년 태인현 산외면 지금실, 오늘날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원지금실에서 김대흠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도강이고, 초명은 김영주이며 기선 또는 기범이라는 자를 썼다. 뒤에 김개남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오하기문』에는 “신인(神人)이 ‘개남’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적혀 있다. 태인의 유력 성씨인 도강 김씨 출신으로, 21세 무렵 임실에서 서당 훈장도 했다고 한다. 그는 1890년 무렵 동학에 입도하고 1891년 최시형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뒤 남접의 주요 지도자로 성장했다.
손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경서보다 『육도삼략』 같은 병서를 즐겨 읽었고, 서자나 가난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고 한다. 신분과 가문보다 능력과 뜻을 중시했던 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1894년 봄 전봉준·손화중과 함께 무장에서 농민군을 일으킨 김개남은 황토현·황룡촌 전투와 전주성 점령으로 이어진 1차 봉기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1894년 5월 전주화약이 체결되자 태인 지역 농민군 3천여 명을 이끌고 남원으로 갔다. 남원은 전라도 동부와 경상도 서부를 잇는 교통·군사상의 요충지였고, 일찍부터 동학 교세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남원부사 민종렬의 압박으로 동학 세력이 제대로 힘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종렬이 나주목사로 승차하고 김개남이 대군을 이끌고 들어오면서, 남원은 곧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김개남은 남원에 전라좌도의 총지휘본부인 대도소와 집강소를 설치하고 순창·무주·진안·용담·장수·금산, 나아가 경상도 함양·안의에 이르는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봉준이 전라우도를 중심으로 집강소 질서를 이끌었다면, 김개남은 남원을 거점으로 전라좌도의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영향력은 담양·곡성·구례·순천 등 전남 동부로도 뻗어갔다.
그가 중용한 젊은 지도자 김인배는 1894년 6월 순천으로 내려가 영호도회소를 설치했다. 영호도회소는 2차 봉기에 앞서 조직적 전투 준비에 나선 선도적 농민군 조직으로, 순천을 중심으로 광양·여수·구례·낙안은 물론 하동·진주 등 경남 서부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순천은 전남 동부 활동의 본거지가 됐고, 광양은 하동과 진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여수는 전라좌수영과 해상로를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김인배와 전남 동부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병력과 무기를 모았다. 김개남이 전남 동부의 모든 활동을 직접 지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김인배의 영호도회소가 김개남이 이끈 남원 대도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다시 봉기했다. 이는 수령의 탐학과 낡은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 차원을 넘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는 항일전쟁이었다.
김개남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음력 8월 19일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으로 들어왔다. 더 늦기 전에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며 이튿날인 8월 20일 재봉기를 선언했다. 그만큼 2차 봉기에 적극적이었다. 김개남이 남원에서 먼저 봉기하자 최시형과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적잖이 당황했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남원으로 달려왔다.
전봉준은 청국과 일본 중 “어느 쪽이 이기든 반드시 군사를 우리에게 돌릴 것이다. 우리 무리는 오합지졸이어서 쉽게 무너진다. 각 고을 농민군의 역량을 보존하면서 시세의 변화를 지켜보자”며 봉기 계획의 보류를 권고했다.
손화중도 “전라도가 모두 호응하고 있지만 덕망 있는 사족이나 부민, 지식인은 지지하지 않는다. 인심의 향배를 알 수 없으니 사방에 역량을 보존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좋다”고 만류했다.
그러나 김개남은 “이 큰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고 재봉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의 8월 27일자 보고에는 “동학농민군은 남원에서 대공론(大公論)을 열 터이니 집합하라는 격문을 사방에 보내고, 이미 모인 수가 수만 명”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 측도 당시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개남의 강력한 주창에 이어 마침내 전봉준도 9월 10일 거병하기에 이르렀다.
10월 12일 전봉준이 4천여 명을 이끌고 삼례를 떠나 북상하자, 이틀 뒤인 10월 14일 김개남도 8천여 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났다. 김개남 농민군은 임실을 거쳐 10월 16일 전주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탐학과 농민 탄압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남원부사와 고부군수 등을 처형했다. 이어 고산과 금산을 장악하고 진산·진잠 방면으로 진출했다.
김개남은 타협보다 단호한 처단을 앞세운 지도자였다.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를 징치하는 그의 행동에 환호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보복과 처벌이 지나쳐 민심을 잃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만 이 기록의 상당수가 농민군을 ‘비도’로 규정한 관군과 지방 지배층의 시각에서 작성되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김개남을 무조건 영웅화해서도 안 되지만, 진압자의 기록만으로 잔혹한 폭도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은 공주가 아니라 청주를 향하고 있었다. 동학 교세가 강한 보은과 가까운 청주 일대에서는 최시형을 따르는 북접 농민군이 곳곳에서 봉기하고 있었다. 청주를 점령하면 이들과 결합하고, 충청도의 군사 거점을 무너뜨린 뒤 서울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김개남의 청주 진격은 전봉준의 합류 요청을 거부한 단순한 독단으로만 볼 수 없다. 공주와 청주를 동시에 압박해 관군과 일본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호남의 농민군과 충청지역 동학 세력을 연결하려는 또 하나의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회덕을 거쳐 신탄진을 장악한 뒤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했다. 청주 지역 농민군도 성 밖 무심천과 육거리 일대에서 호응했다. 청주성 방어에는 충청병영 관군과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동원됐다. 농민군은 화승총과 창을 들고 성으로 돌진했으나 사거리·명중률·연사 속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이길 수 없었다. 청주성 공격은 실패했고, 김개남군은 진잠과 연산 방면으로 물러났다. 11월 14일에는 남원에 남아 있던 농민군마저 운봉 민보군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김개남의 세력 거점이 사실상 붕괴한 것이다.
같은 시기 목천 세성산에 집결한 충청 지역 농민군도 관군 선봉장 이두황 부대의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 청주를 공격한 김개남군과 세성산 농민군의 연합 가능성도 사라졌다. 이두황은 뒤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항일전쟁에 나선 농민군을 진압하는 선봉에 섰다는 사실은 2차 봉기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개남의 청주 진격이 진행되는 동안 전봉준과 손병희의 연합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사투를 벌였다. 전남 동부에서는 김인배의 영호도회소군이 순천·광양·여수와 하동 일대에서 항일전선을 형성했고, 전남 서남부에서는 손화중·최경선 부대가 나주 수성군과 맞섰다. 2차 봉기는 공주 한 곳의 전투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펼쳐진 전면전이었다.
청주에서 패한 김개남은 11월 14일 연산에서 전봉준 부대와 합류해 관군·일본군과 다시 싸운 뒤 전라도로 물러났다. 그러나 거점이던 남원이 이미 민보군의 수중에 들어가 태인 산내면의 매부 서영기 집에 몸을 숨겼다. 그는 옛 지인의 고발로 붙잡혀 전주로 압송됐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서울로 보내 정식 재판을 받게 하지 않고, 1895년 1월 8일 전주에서 즉결 처형했다. 그의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 밖에 내걸렸다.
전봉준에게는 심문과 재판 기록인 공초가 남았지만 김개남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직접 진술한 기록이 없다. 승자의 기록과 그를 적대했던 지방 지배층의 문서가 그의 모습을 대신했다. 이 때문에 김개남은 오랫동안 과격하고 잔혹한 인물, 전봉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분열적 지도자로 그려졌다.
김개남은 전봉준의 부하도, 실패한 별동대장도 아니었다. 그는 1차 봉기 때 전봉준·손화중과 함께 농민군을 이끈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남원 대도소를 중심으로 전라좌도와 전남 동부, 경남 서부를 잇는 광범한 혁명 기반을 구축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가장 먼저 재봉기를 촉구했고, 청주라는 또 하나의 군사 거점을 향해 대군을 이끌었다.
그의 선택이 모두 옳았던 것은 아니다. 지나친 강경책은 반발을 낳았고, 전봉준 부대와 긴밀한 군사 협조를 이루지 못한 것은 2차 봉기의 한계로 남았다. 그러나 청주 진격을 단순한 독단과 실패로만 평가한다면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전국성과 항일전쟁의 성격을 놓치게 된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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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피해 ACC로···평일에도 이어진 ‘문화피서’
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창조원 복합전시6관에서 진행 중인 ‘자밀 프라이즈:무빙 이미지’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정보원을 이용하고 있다.
“방학이라 아이들이랑 어디라도 가야 하는데 날씨가 너무 덥잖아요. ACC는 시원하고 볼거리도 많아서 오늘은 여기로 피서 왔어요.”폭염이 이어진 14일 오후 찾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평일 오후 시간대였지만 전당 곳곳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야외 활동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무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문화생활을 즐기려는 이른바 ‘문화피서’ 행렬이었다. 전당 A·B 주차장은 만차 안내가 표시될 정도로 차량이 몰렸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족 단위 관람객부터 책을 읽거나 전시를 둘러보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정보원을 이용하고 있다.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은 어린이문화원으로 향했고, 전시장 안내도를 들여다보던 관람객들은 복합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비 한쪽에서는 잠시 쉬어가는 시민들도 보였다. 바깥의 뜨거운 햇볕과는 달리 시원한 실내에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문화정보원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시민들로 활기를 띠었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펼쳐 공부하는 학생들과 자료를 찾는 이용객들이 자리를 잡았고, 라운지에서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책을 읽고, 다른 곳에서는 잠시 대화를 나누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더위를 피하는 모습이었다.14일 오후 시민들이 ACC 문화상품점 ‘들락’에서 굿즈를 살펴보고 있다.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분위기는 더욱 분주했다. 문화창조원 복합전시 6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교류특별전 ‘자밀 프라이즈: 무빙 이미지’에는 영상과 설치, 사운드, VR 등 다양한 작품을 관람하는 시민들이 이어졌다. 이슬람 문화와 역사, 사회에서 영감을 받은 동시대 예술을 선보이는 전시인 만큼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멈춰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전시장 곳곳을 천천히 이동하며 작품을 살폈다.복합전시 3·4관에서 열리는 ‘코스모 아시아 피플’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코스모·아시아·피플’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위기의 지구와 인간, 아시아의 상상력을 바라보는 전시다. 작품 앞에서 한참을 머무는 관람객들의 모습에서는 더위를 피하는 것과 함께 전시를 통해 새로운 생각거리를 찾는 분위기도 눈에 띄었다.복합전시 2관의 ‘아시아의 장치들’에서는 영상과 비디오아트를 통해 아시아의 역사와 기억, 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관람객부터 전시장 구조물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관람객까지 다양한 모습이 잇따랐다.어린이문화원은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특히 붐볐다.14일 오후 어린이 관객들이 ACC 어린이문화원 다목적홀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 ‘스포츠 히어로즈:나도 국가대표’에 참여해 펜싱 체험을 하고 있다.17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 ‘스포츠 히어로즈: 나도 국가대표!’가 열리는 다목적홀에서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특히 분주했다. 리듬체조와 펜싱, 스내그골프, 플로어컬링 등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스포츠를 직접 체험하며 아이들은 연신 몸을 움직였다.펜싱 체험에 나선 한 어린이는 “엄마, 나 펜싱에 재능 있는 것 같아”라며 보호자를 향해 손짓하며 웃는 모습도 보였다. 보호자들은 아이가 스포츠 체험에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사진을 촬영했다. 폭염 때문에 밖에서 뛰어놀기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실내 체험공간이 또 하나의 놀이터가 된 모습이었다.14일 오후 어린이 관객들이 ACC 어린이문화원 어린이체험관에서 진행 중인 상설전시 ‘우리 모두의 집, 아시아’를 관람하고 있다.어린이체험관의 상설전시 ‘우리 모두의 집, 아시아’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바다와 갯벌, 습지와 호수, 숲과 사막 등 아시아의 자연환경을 주제로 한 공간을 따라 아이들이 직접 움직이고 체험하며 자연과 생태의 의미를 배웠다.이날 딸과 함께 ACC를 찾은 시민 정하영(38·여)씨는 “요즘은 너무 더워서 아이와 야외에서 오래 놀기가 쉽지 않은데, ACC는 시원한 공간에서 전시도 보고 체험도 할 수 있어 좋다”며 “방학 동안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글·사진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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