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시간장치 통해 기억 소환
진솔한 직관과 고백 감성 자극
삶의 진실과 만난 서정의 뿌리
시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기억을 재생하는 일이다.
박광영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발자국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문학들刊)을 펴냈다.
시인은 '밥'과 '별' 사이의 거리를 오간다. 인생은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살 수 밖에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중심을 잡는 일일 것이다. 꿈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긴장하고 갈등하며 살아온 시인은 어느 날 모내기를 하면서 밥과 별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가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흙탕물에 모(밥)를 심는 행위가 파란 하늘에 별을 심는 행위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박 시인의 연륜과 짧지 않은 시력에서 왔을 것이다. 이 시를 보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석류알처럼 반짝이던//그이의 고른 이를 생각한다//문득,//유월의 저무는 무렵"('문득, 유월')
단 넉 줄에 불과한 이 시를 대하고 독자는 각기 다른 자신만의 "그이"를 떠올릴 것이다. 석류알처럼 반짝이던 그이는 연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유월인가.
시인은 유월의 어느 저무는 무렵에 붉게 핀 석류꽃을 보고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이는 석류알처럼 반짝이는 고른 이를 가졌다. 꽃은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 혹은 꽃조차 피우지 못한 사람, 사랑했으나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 투쟁했으나 그것을 쟁취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불태워버린 사람. 이 시는 그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을, 반성을, 사죄를. 이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에 각기 남아 있는 무수한 그이들을 되새기게 해준다.
유월은 단순한 '시간기호'가 아니라 '저무는 무렵'의 지시어로 6월이 지닌 기억·추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통시적 '시간장치'이다. 시인은 문득이라는 돌발적 시간을 추동하는 부사어를 빌려 6월이 함의하는 특별성을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그이'는 첫사랑 연인의 범위를 넘어 서서 광의의 확장성을 숨기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 배경이 6·25나 6월 항쟁으로 확장될 경우, 그이의 고른 이는 역사 속 '민중의 입'을 상징하는 공감각적 이미지로 승화한다.
박광영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모호함 대신 진솔한 직관과 고백을 통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흙탕물에 담긴 파란 하늘처럼 현실과 꿈의 거리를 오가며 그가 찾는 서정의 뿌리가 우리가 오래전에 읽어버린 동심, 곧 삶의 진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오솔길을 걷다/정수리쯤 걸려 있는 거미줄//밤새,/냉한 가슴만 움켜잡았나/이슬방울 가득하다//생은, 빈털터리/그러나 서툰 투망질에도/빛나는 때가 있다"('새벽')
박광영 시인은 광주에서 태어났다. 지난 2014년 계간 '시와정신'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리운 만큼의 거리'와 수필집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를 펴냈으며, 2019년 '시와정신' 시인상을 수상했다.
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 대장간에 남아 있는 우리의 모습 "누군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쌓여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이 책의 귀함과 무게가 거기에 있다."한때 서울 을지로 7가는 대표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랬던 대장간들이 1970∼80년대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이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장간 셋이 붙어 있는 인천 도원동이 국내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라 할 수 있다.도원역 부근에 있는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중 맏형 격은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운영하는 인일철공소다.책 '대장간 이야기'는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인 대장장이와 대장간의 모든 것을 담았다.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을 누빈다.역사 속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저자는 또 대장간이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임에 틀림 없다고 말한다.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에 건넨 선물 중 휴대용 불붙이는 도구 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시를 일컬어 적었던 화금(火金)은 불을 일으키는 쇠라는 말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쇳조각이 부시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불과 쇠가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이 책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우리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세계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말하는 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나아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을 누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장간 다섯 곳, 일본의 다네가시마 대장간 한 곳의 현장 모습을 보여준다.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네 곳 등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서 일한다. 젊은 누구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 대장장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장간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는 아쉬워한다.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마운 건 이때껏 대장간 현장을 지켜내온 이 땅의 나이 드신 대장장이 장인들이다. 힘에 부칠 때마다 대장간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고는 했다.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 말고도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대장간 일은 쇠를 불에 달구는 작업이 우선이다. 화로에는 풀무가 따라붙는다. 바람이 없으면 화로에 불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대장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냥이다. 충청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장간을 승냥깐이라 한다. 이 승냥이라는 말이 성냥에서 나왔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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