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고도 성실한 글노동에 배인 사유
순하고 과장 없는 단순한 말과 산문
어렵고 듣기 괴로움 속 꿋꿋한 문장들

소설가 김훈은 우리 삶의 어쩔 수 없는 비애와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문장 속에 담아왔다.
김훈 작가가 산문 '허송세월'(나남刊)을 펴냈다.
그는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첫 문장에서 감지되듯 그는 죽음마저 일상적 루틴으로 여기는 '글 쓰는 실무형 노동자'다. 어느덧 여든에 가까워졌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바라보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 그 오래고도 성실한 노동의 흔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노년에 접어든 후 술과 담배에 품게 된 애증의 감정을 털어놓은 서문 '늙기의 즐거움'을 지나쳐 1부 '새를 기다리며'를 펼쳐들면, 김훈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14편의 글이 기다린다. 심혈관 계통의 질환 때문에 그간 크게 아팠다고 고백하며 그는 말 그대로 "신체 부위와 장기마다 골병이" 든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것인지 자조하고, 몸이 완전히 사그라들어 마침내 뼛가루가 되기 전 어떤 유언을 남길 것인지 고심한다.
이렇듯 입원실에 누워 오줌통에 소변이 고이는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애환은 자연스럽게 생로병사의 무거움을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나마 버텨 내야 하는 중생의 고단함에 대한 반추로 이어진다. 일산 호수공원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노년의 나날을 보내는 그는 자신의 말이 이 고단함에서 벗어나 삶의 맨 얼굴에 닿기를 꿈꾼다. 그는 "허송세월로 바쁘다"고 말한다.
허송세월에 바쁘다는 그가 2부 '글과 밥'에서 눈을 돌리는 곳은 다시금 "밥벌이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지지고 볶는 일상"이다. 일찍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했던 그에게 먹고사는 일의 애달픔을 정확히 포착하는 글쓰기는 평생의 과제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을 버리고 필요한 말만을 부림으로써 언어를 삶의 한복판에 밀착시키고자 한다. 글 쓰는 이와 모국어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리는 허약한 품사를 과감히 쳐 내고, 사물을 향해서 "빙빙 돌아가지 말고 바로 달려들"기 위함이다.
필요한 말만을 정확히 부리려는 노력은 삶의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소박한 물건들에 애정을 보이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박물관에서 가야토기의 "어둡고 서늘"한 구멍을 들여다보며 그는 신라의 철제 무기에 스러져 간 가야 옹기장이들의 비애를 생각한다. 반면 생활 속 쓰레기가 일상의 연장이 되어 돌아온 똥바가지를 보면서는 "펄펄 살아 있던 활물"에 신명이 뻗치기도 한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한" 이 물건들에서 들려오는 듯한 "순하고 과장 없는" 단순한 말들이 그의 산문 언어가 향하는 지향점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어 3부 '푸르른 날들'에 다다르면 작가는 시선을 더 멀리 두어 난세를 살았던, 또는 살고 있는 이들에게로 관심을 뻗친다. 다윈과 피츠로이,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안중근의 청춘이 그의 문장에서 교차되며 떠오른다. 이러한 호명은 방정환, 임화, 최인훈, 박경리, 백낙청, 신경림…으로 이어진다.
서늘한 시대를 살면서도 푸른 날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근심과 희망이 남은 자리를 성실하게 더듬어 가던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지금 여기'의 중생고로 향한다. 가혹한 현실 속에서 "끼여 죽고, 깔려 죽"었던 수많은 이웃의 죽음을 기리기 위함이다.
늙어 가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글로 운을 떼어, 도로변의 투명 벽에 부딪쳐 죽는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옛 병사를 향한 헌사로 닫는 45편의 산문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에 포박되어 있던 가엾은 중생의 말에 바치는 송가다.
김훈 소설가는 48년 서울에서 태어나 73년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활동 후 소설을 쓰고 있다. 그동안 '문학기행'(박래부 공저)과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등을 냈다. 동인문학상과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받았다.
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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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선으로 그려낸 삶과 추억 384 시는 감성의 산물이다. 이성과 논리의 언어가 아니다.그래서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힐 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김영자 시인이 최근 시집 '시꽃 물들다'(시와사람刊)를 펴냈다.이번 시집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새로운 해석과 착상이 돋보이는 시편들이 수록돼 있다.시인은 모서리 없는 향기처럼 함박웃음으로 너울거리는 모란을 보여 아슬히 푸른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며 홀연히 춤추다 지는 절망을 노래하기도 한다.그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바탕에 갈아 싱그런 표현들을 버무렸다."먼동 트이는 아침/ 눈부신 햇살 주워담은 개천가/ 물비늘의 눈빛 반짝거린다// 왁자한 소문 울컥이는 어둠 닦고/ 너스레한 노점 아지매들의 혈색 좋은 웃음소리삼백육십오 일 좌판 깔고 흥정한다// 줄줄이 엮은 부양가족 품기 위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시커멓게 멍든 주먹 가슴으로/ 애환의 물살 건넌다// 생채기로 찢긴 날카로운 비수/ 아린 침묵 꿰매며/ 도마 위에 납작 엎드린 오후/ 삐걱거리는 허리 통증 할퀴고 간/ 파닥이는 은빛 나래짓/ 황금빛 노을 떨이한다// 세느강이라 불리는 양동 다리 옆/ 역사 깊은 광주의 푸른 기상 안고/ 무등의 젖줄기로 태어난/ 화이트칼라 미모와 흰 베레모 뽐내는/ 중앙여고// 양동 다리 밑/ 떡볶이와 오징어 튀김도/ 덩달아 튀어올라/ 발랄한 안색으로 무더기 수다 떤다// 철썩이던 광주천 계곡/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버들강아지 빛으로 남아 있다."('추억의 양동시장' 전문)예나 지금이나 광주 양동시장은 사람과 상인들로 북적댄다. 그 시절 양동시장은 광주의 중심이며 정이 묻어나던 곳이었다.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이들도 양동시장의 활기와 생명력에서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추억이 됐고 아련한 시간 속에서도 기억으로 자리해 있다.박덕은 시인은 "사실 시는 주제를 노출할수록 시의 특질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며 "김영자 시인의 시들은 이러한 시의 특질을 잘 고루 구비하고 있어서 한층 돋보인다"고 평했다.김영자 시인은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며 "자연 안에 깃든 신성을 벗삼아 더 이상 헤매일 것 없는 내 안의 나를 만나 깊이 잠든 시심을 깨운다"고 말했다.그는 '현대문예' 추천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한국여성문학대전 최우수상, 독도문학상, 빛창문학상 우수상 수상, 광주문인협회 이사와 광주시인협회 이사, 한실문예창작회원, 둥그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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