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진 글·정은선 그림|서유재|152쪽
궁에서 쓰일 과실을 키우는 곳인 궁내 과원에서 아빠와 사는 아란은 언제나처럼 단짝인 명이와 운종가 구경을 나간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리는 곳이라는 뜻의 운종가에는 오늘도 풍물패가 나와 한창 신이 났다. 그런데 과원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아빠가 왜 운종가에 나와 있을까? 아빠를 몰래 뒤쫓는 게 분명해 보이는 명이의 아빠 병규 아저씨까지? 수상해 보이는 두 아빠를 명이와 아란도 쫓아가 보지만 풍물패와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해 길이 막혀 그만 놓치고 만다. 며칠 후,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나랏돈을 가로챘다는 죄로 아빠를 잡아간다. 모진 고초를 못 이긴 아빠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아란은 아빠가 누명을 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장례를 치른 후 슬픈 마음으로 거리를 헤매던 아란은 운종가에서 수임을 만난다. 댕기를 파는 소녀인 수임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아란에게 사 준 댕기 덕분에 친구가 됐다. 그리고 아란은 수임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빠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간 날 수임에게 편지 한 통을 맡겨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아란에게 남긴 편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책 '글자 없는 편지'는 1900년대 대한제국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동화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는다.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일본의 야욕에 바탕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내정 간섭에 들어간다.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은밀히 함께할 사람들을 찾는다.
이 작품은 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아란의 아빠와 아빠의 동료인 달석 아저씨, 국숫집 주인, 저잣거리를 떠도는 풍물패의 수장, 아란의 동무인 수임의 오빠와 아빠를 비롯한 평범한 이들의 나라를 위한 눈물겨운 헌신을 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물들이는 존재"라는 작가의 말처럼 나와 사회가 얼마나 깊게 연결돼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아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곱씹게 한다.
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 "제주의 사람과 풍경 글과 그림에 담았어요" 384 시인에게 시는 밥줄이자 자신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다.박노식 시인은 등단 후 9년 동안 5권의 시집과 1권의 첫 시화집을 출간, 왕성한 창작활동과 필력으로 자신만의 시탑(詩塔)을 쌓아가고 있다.박노식 시인이 자신의 대학동문인 이민 화가와 두번째 시화집 '제주에봄'(스타북스刊)을 펴냈다.이번 시화집에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유적, 박물관, 카페 등을 여행하며 두 사람이 쓰고 그린 100편의 글과 100편의 그림이 실려 있다.각각의 글과 그림은 제주의 숨겨진 풍경과 매력을 새롭고 다채롭게 펼쳐냈다.지금은 국내 최고의 휴양지이지만 제주는 눈부신 풍광 속에 4·3이라 불리는 역사적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슬픔의 땅이자 사람과 자연, 바다가 치유와 행복을 건네는 '천국'이다.박노식 시인과 이민 화가는 책머리에서 책에 담고자 하는 뜻을 전한다."오직, 시만 쓰고 오직, 그림만 그리는 순한 두 사람이 만나서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운 책을 낳았습니다. 제주는 슬픔의 섬이고 예술적 상상력의 바다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픈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곳의 아포리즘과 그림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당신과 우리는 한 수평선에 누워서 낮의 흰 구름과 밤의 푸른 별을 함께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첫 장 이민 작가의 작품 '밤 11시30분 솔동산로'에 입힌 박노식 시인의 글을 보자."홀로 밤길을 걷는 사람은/ 가로등 아래에서 어떤 슬픔을 찾으며/ 누군가를 오래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익숙한 길이건 낯선 거리건 우리는 어두운 밤 홀로 걸을 때 누군가를 만났던 장면과 감정을 떠올린다.생각은 기억을 부르고 그 기억은 흘러버린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가며 그 때의 그 장면들을 되새기게 한다.그것은 때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혹은 추억과 후회로 가슴을 후벼파기도 한다.박 시인은 이민 작가와 함께 제주 곳곳의 공간과 풍경을 포착한 순간과 그림에 담긴 모습을 오버랩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느낌과 서정, 서사를 입혔다.그는 비 내리는 서귀포 명동거리에서 먹먹한 가슴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자신과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기억의 고통을 감내한 인내로 내일을 기약하기도 한다.'신서귀포 메밀꽃밥'에서는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듯 피어난 꽃을 보며 상처도 삶의 일부임을 말한다.그의 시선은 계속 이어진다. 간밤의 고통을 이겨내고 떠오른 아침햇살을 보며 이별의 아픔도 영원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붙들지 않고 놓아주지 않는 기억 하나가 있다면 이 또한 자기의 전부였음을 인정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임을 보여준다.이렇듯 각각의 글과 그림에는 사실적 풍경 속에 담긴 화폭에 입힌 작가의 손길과 시인의 눈으로 건져올린 그림 속 언어들이 슬픔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와 희망을 건네준다.박노식 시인은 "보석 같은 제주도 곳곳의 풍경과 공간들을 담백한 필치와 색채가 어우러진 이 민 작가의 그림을 매개로 그때 그때의 느낌의 단상들을 간결한 시적 언어로 고백하듯 써 냈다"며 "고단한 삶 속에서 잠시나마 하늘과 구름, 별을 보듯 쉬어가는 마음으로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박노식 시인은 어느 봄날, 꿈속의 그에게 불현듯 나타난 또 다른 그가 했던 말 "한 권 시집도 없이 위로 올라오지 마라!" 그는 이 현몽을 얻고 생업을 접었다. 독한 마음으로 화순군 한천면 가천마을에 둥지를 틀고 오직 시만 썼다. '유심'에 '화순장을 다녀와서' 외 4편으로 신인상을 받고 등단,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조선대 국문과를 나와 현재 광주 동구 '시인 문병란의 집'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이민 화가는 조선대학교 미대 회화과와 일본 동경 다미미술대학 판화과 석사학위 취득 후 국립현대미술관 아카데미와 국내 여러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작가는 자신만의 '판타블로 : 판(판화)+타블로(서양화)'라는 특수한 기법을 고안, 9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제주도 그림만 1천점을 목표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사진=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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