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영암 영보정

입력 2020.03.31. 15:14
"창랑의 물이 흐릴 때는 떠나는 법" ···진퇴를 알았던 최덕지
최덕지선생 영정

영암 덕진면 영보정(永保亭), 월출산이 북향한 너른 들에 있다. 정자 앞에 마른 못이 있고, 소나무 한 그루와 늙은 느티나무들이 수문장처럼 주위에 서 있다. 수령 400년이 다 된, 영보정과 은성했던 날들을 함께한 것들이다. 영보정은 대지 400평에 건평 40평으로 땅도 넓고 집도 크다. 조선 초기 문신 최덕지 선생의 정자다. 최덕지는 호가 연촌(烟村)·존양(存養)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전기 세조 1년까지(1384~1455년) 살았던 인물이다. 1405년(태종5) 21세에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한 뒤에 사관이 되었다. 이어 감찰 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하고, 남원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영암으로 내려온다. 영보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사위 신후경과 함께 영보정을 지었다. 이후 쇠락하였다가 1630년경 최덕지의 7대손인 최정, 외손 신천익 등 후손들이 뜻을 모아 재건했다. 양 문족이 부분 중개수하면서 한말까지 이어온 것이 지금의 영보정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조선의 동계(洞契) 관련 정자 중에서도 큰 규모이다. 내부는 3면이 마루이고 후면 가운데 방을 둔 독특한 평면형식이다. 기둥과 도리, 처마의 자재가 단단하고, 들보는 나무의 수형을 그대로 살려 천연의 미를 더했다. 단층 팔작지붕으로 네 귀의 추녀를 찰주로 받치고 있다. 현판은 추사와 쌍벽을 이룬 한석봉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미, 완성도를 인정받아 지난해 보물(2054호)로 승격됐다.

최덕지는 이곳에서 학문에 힘쓰면서 호를 '존양(存養)'으로 바꾼다. 존양은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 그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존심양성이 어려운 말이라, 풀어놓아도 어렵다. 주희는 존심양성 앞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놓았다.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하는 격물치지가 존심양성의 수도법이라고 했다. 존심양성은 옳은 이치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 정도로 나는 이해한다. 존양은 이곳에 누정을 지었는데, 정(亭)이 영보정이고, 누(樓)가 서재로 지은 존양루(存養樓)다. 현판은 안평대군 친필이라고 한다. 정에서는 후학을 가르쳤고, 누에서는 스스로의 학문을 닦았다.

1450년 즉위한 문종이 최덕지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을 제수한다. 직제학은 정삼품으로 예문관의 예악형정(禮樂刑政)에 관련된 일을 기록하는 사관이다. 그러나 이듬해 치사(致仕)한다. 치사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이다. 연촌 행장에 보면 '문종이 "그 사람이 순실하고 아직 늙지 아니하였으므로 내 머무르라고 하고자 한다"하고 육신과 모든 경대부가 만류 하였으나 선생이 가로되 "내 어찌 세상을 잊으리오. 머무르면 빈 벼슬이요, 가는 것이 내 분수라. 내 집에 작은 초당이 있으니 돌아가 내 여년을 마치기를 결단하였노라"라고 제공들을 이별하니 술을 실어 강가에 보내고 또 글로 송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존양의 나이 68세이다. 임금이 낙향한 전대의 신하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애써 떠나려는 이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한 것이었고 아마도 승승장구할 일만 남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을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말년에 벼슬이 올라 아랫사람을 많이 부리고, 녹봉을 더 받으려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가문의 부와 명예가 걸린 벼슬을 두 번이나 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수양이 깊었고, 진퇴의 때를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그에게 예를 표했다. '시종일관 의리를 다하신 선생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로세'(성삼문), '급류에 용퇴한 사람이 얼마나 되던가, 선친과는 일찍이 상투 틀면서부터 노니셨는데'(신숙주), '선생의 귀향에 즈음하여 왜 이구동성으로 감탄하고 칭송하는가? 인심을 감동시키는 중망이 조정에 있지 않고 전리(田里)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박팽년). 기대승의 고조부 기건은 '월출산 구름 짙어졌다가 엷어지면, 덕진강 물길은 하늘 끝까지 멀리 흐르겠네'라고 했다. 28명이 송별시를 남겨 '연촌유사'에 전한다. 이 시들만 보아도 그 때가 어느 때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문종 2년,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위해 발호하던, 바야흐로 피바람이 시작될 폭풍전야의 고요가 아니던가. 문종은 곧 죽고, 단종도 서러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4년이 채 안 남은 시점이다. 때를 알아도 떠나는 사람이 있고, 못 떠나는 사람이 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굴원이 말했지만, 창랑의 물은 스스로 청탁(淸濁)을 알려주지 않는다. 한강변에서의 송별시를 쓰고 떠나지 못한 여섯 사람은 사육신이 되고, 송별시를 받아들고 영암으로 내려온 존양은 천수를 누린다. 그러니까 그 이별의 자리가 사실은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셈이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억조창생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데서 의(義)가 있지만,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데서는 지(智)가 있다. 최덕지는 세조가 즉위하던 1455년 영보정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가운데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신으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친 것이다.

1713년 숙종은 직접 최덕지의 영정, 유지초본과 함께 1630년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어 있던 서원에 '녹동(鹿洞)'이라는 사액을 내린다. 영정은 의습(衣褶)의 처리, 신체의 표현이 세밀하며 여말선초의 발립(모자)을 쓴 것이 특이하다. 얼굴은 갈색을 띠고 눈썹은 한 올 한 올 밑으로 내렸으며 눈매는 작지만 생기가 있다. 유지초본은 기름종이에 그려진 영정의 밑그림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다. 영정과 유지초본은 1975년 지정된 보물(594호)이다.

영암 영보정

영보정은 그 뒤 일제강점기인 1921년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한 영보학원으로 활용되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영암지역 항일 투쟁활동으로 꼽히는 1931년 형제봉 만세운동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과 청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이곳에서 마을축제 풍향제가 열린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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