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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담양 상월정

입력 2020.09.01. 14:19 수정 2020.09.04. 14:47
고경명·고인후·고광순·고정주…누더기 역사의 빛나는 장면들

상월정 뒤로 둘러쳐진 대밭을 바라보면서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말이 생각난다. 

고경명이 고인후를 낳고, 

고인후가 고정주와 고광순을 낳고, 

고정주가 김병로를 낳고… 

난국과 망국의 누더기 같은 역사 속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빛나는 페이지들이 

남아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고광순이 삶의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살다간

 의인(義人)이라면, 

고정주는 멀리 내다보고 기다리며 

준비한 지인(智人)이라 할 것이다.


따가운 햇볕이 많이 누그러지고 아침 바람결이 다르다. 길 가에 늘어선 배롱나무의 분홍이 저 만큼 짙어지면 여름의 끝자락, 계절이 교대하는 시간이다.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하는 처서(處暑) 말후 즈음.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무엇이 오는가 싶으면 가고, 또 가는가 싶으면 무엇이 온다. 저 산 모퉁이를 돌아 뒷짐지고 걸어오는 장주(莊周)처럼, 가을이 느릿느릿 사립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런 날은 사골을 뽀얗게 우린 돼지국밥에 막걸리가 생각난다. 창평 국밥집에나 한번 들르고 싶다. 거기서 국밥 한 그릇만 먹고 그냥 가 버린다면 얼마나 서운한 일인가. 창평 장에서 동쪽으로 5분 거리에 창평초등학교가 있다. 114년의 역사를 지닌 이 교정을 한 바퀴 돌고, 정면의 '창흥의숙(昌興義塾)' 표석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상월정으로 간다. 상월정은 초등학교에서 2㎞ 남짓, 용운 저수지에 차를 대고 30여분 걸어간다. 월봉산 자락의 이 길이 좋다. 노송과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같은 여러 참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길이 끝나려는 곳에 늙은 모과나무가 한그루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노랗게 익은 모과가 반겨줄 것이다. 한 모퉁이 돌면 팔작지붕의 단아한 옛 다락집 한 채, 상월정(上月亭)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암자(대자암)였다. 그 사지(寺址)에 1457년(세조 3년) 김자수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상월정을 지었다. 그는 이 정자를 손자사위 이경에게 주었다. 이경은 다시 사위인 고인후에게 넘겨준다. 주인의 성이 김씨, 이씨, 고씨로 바뀌었다. 고인후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고경명의 아들이다. 고경명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에서 거병한다. 그의 나이 60세. '나, 고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류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옷소매를 떨치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국가 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 아끼려 하겠는가' 제갈량의 출사표, 최치원의 황소격문에 비견되는 유명한 '마상격문'이다. 그는 격문을 토하면서 장남 종후, 차남 인후와 함께 6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진군한다. 금산에 집결해 있던 왜군과 대전투가 벌어진 그해 7월10일 고경명은 전사하고, 차남도 순절했다. 향년 32세. 장남 역시 1년 뒤 진주성 전투에서 숙부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했다. 향년 40세. 광주 포충사 주벽에 아버지 고경명, 동배위에 장남 고종후, 서배위에 차남 고인후가 제·배향되어 있다. 상월정은 그 후 황폐화 되었다가 1808년 중창하였고, 수차례 개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고인후의 후손들은 대대로 창평에 터를 잡고 살아서 본관은 장흥이지만, 창평 고씨라고도 한다.

조선의 멸망은 1910년 경술국치이다. 그에 앞서 1909년 기유각서 때 사법권이, 1905년 을사늑약 때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1905년이 망국의 시작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부터 300여년이 흐른 그 즈음 이곳에서 다시 두 갈래 구국의 깃발이 나부끼니 하나는 무(武)요, 하나는 문(文)이다. 고인후의 후손으로 깃발을 세운 걸출한 두 명의 인물, 녹천 고광순(1848~1907)과 춘강 고정주(1863~1934)다. 고광순은 11대 종손이고, 고정주는 10대 손으로 숙질간이다. 나이는 고광순이 15세 많다. 두 사람은 창평에서 이웃하여 장성했고, 상월정에서 공부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었으되 난국에 처하여 가는 길은 달랐다. 한 사람은 총을 들고 무력투쟁에 나섰고, 한 사람은 붓을 들고 교육사업에 투신했다.

담양 상월정

고광순은 '행장'에 따르면 '차츰 장성하여 상월정에 올라가 10년 동안 문을 닫고 마음을 다해 육경을 전공하여 은미한 사연과 심오한 뜻을 조목조목 분석'했던 학자였다. 과거에 응했지만 선발이 문란한 것을 보고 다시는 응하지 않았다. 1896년 을미사변 이듬해 장성향교를 본거지로 1차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거병을 준비하여 1907년 정병 5백 명을 모아 의병장으로 출전한다. 2월 남원성을 기습 점령했고, 5월 화순읍을 탈환해 일인들의 집과 상점을 불태웠다. 10월17일 지리산 연곡사에 주둔하던 고광순 부대는 왜군의 총공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향년 60세.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절명했던 나이와 같다. 월봉산 기슭에는 3백여 년을 사이에 둔 조손(祖孫), 고인후와 고광순의 묘가 나란히 누워있다. '이 제비골의 영명한 혼들은 밤마다 구슬피 울음소리를 내어도 지나가는 이 술 한잔 내오는 일이 없다. 공께서 순절하신 이곳, 흙과 돌이 아직도 혼과 향을 간직하고 있으니 어찌 표지 하나 없을까 하여 큰 돌을 하나 다듬었다.' 효당 김문옥이 비문을 지어 애도했다.

고정주는 18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 규장각 직각(直閣)을 지냈다.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상소하여 늑약 무효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했다. 이 상소가 묵살되자 사직한 뒤 낙향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그는 상월정에 앉아 고민했다. 당시 정세는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의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때다. 다른 한편으로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신채호의 비밀조직 신민회가 결성되고, 대성학교가 설립되던 무렵이다. 전차와 기차가 다니고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던 근대 개화기, 고정주는 후자의 길을 간다. 그는 상월정을 열어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했다. 조선 최초의 영어학교이다. 서울에서 교사 이표를 초청하여 영어를 가르쳤고, 외국어와 산술·지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의 차남 고광준과 사위 김성수가 첫 학생이었다. 김시중과 현준호, 김인수, 송진우가 유년을 이곳에서 배웠다. 1907년 영학숙은 '창흥의숙'으로 확대 개편된다. 서울의 양정·휘문의숙과 같은 시기이다. 광주 서석초교 전신인 광주보통학교가 1906년 개교했고, 이듬해 영어를 가르쳤던 숭일학교가 세워진 것을 보면 창흥의숙은 호남교육의 원조로 꼽힌다. 대부호였던 고정주는 선생 봉급과 학생 월사금 등 일체의 비용을 대어 무료로 운영했다. 1909년 창흥의숙은 창흥학교가 되었다가 훗날 창평초등학교가 된다. 1기 학생에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가 있다. 이 학교 출신 동량지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암흑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등불의 역할을 한다. 교정에 창흥의숙 표석과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고, 역사관에는 고정주 흉상과 교지·칙명 등이 전시되어 있다.

상월정 뒤로 둘러쳐진 대밭을 바라보면서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말이 생각난다. 고경명이 고인후를 낳고, 고인후가 고정주와 고광순을 낳고, 고정주가 김병로를 낳고… 난국과 망국의 누더기 같은 역사 속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빛나는 페이지들이 남아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고광순이 삶의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살다간 의인(義人)이라면, 고정주는 멀리 내다보고 기다리며 준비한 지인(智人)이라 할 것이다. 한 생을 살면서 저러한 족적을 남기면 여한이 없으련만 정의로움이나 지혜로움이나 다 자기희생의 바탕 위에 있는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의의 길과 지의 길은 다른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의의 길은 대체로 단명하니 더 애달픈 마음이 든다. 두 길은 다른 길인가? 같은 길인가? 만해(萬海)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길이면서 다르지 않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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