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장성 고산서원 담대헌

입력 2020.09.17. 18:25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 기정진

내가 말을 타고 간다. 내가 가는 것인가, 말이 가는 것인가? 여기에는 가려는 것과 가는 것이 있다. 가려는 것이 이(理)이고, 가는 것은 기(氣)이다. 퇴계는 내가 이고, 말은 기라고 했다. 방에 노트북과 오디오가 돌아간다. 이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전기다. 전기가 이가 되고, 작동되는 기기는 기라 할 수 있다. 이는 질서이고, 기는 운용이다. 성리학은 이기(理氣)로 우주와 인간을 설명하고 싶었다.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선이다. 천지만물에 공통하는 본성이므로 절대 선이다. 기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기는 상황에 따라 맑음과 탁함(淸濁), 온전함과 치우침(偏全)의 차이가 있다. 이는 보편성, 기는 특수성이다. 사람은 본래 선하지만 환경에 따라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다. 주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사람에게는 성정(性情)이 있다. 성은 미발(未發)이고, 정은 기발(旣發)이다. 정에 사단칠정이 있다. 사단(四端)은 인의예지(仁義禮智)로 가는 길이다. 아이가 우물로 기어갈 때 타산 없이 구해주는 측은한 마음이 인의 단초다. 부끄러운 마음이 의, 사양하는 마음이 예, 시비분별이 지의 시작이다.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이다. 퇴계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했다. 이 말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은 다르다는 것이다. 둘은 별도로 존재한다. 사단은 절대 선이며, 고귀하고, 도심(道心)이며 이가 주체다. 칠정은 선악이 섞여있으며, 비천하고, 인심(人心)이며 기가 주체다. 반면 고봉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칠정 속에 있다. 칠정이라는 감정 속에 선악이 혼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나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퇴계는 이기가 각각 발하여(理氣互發說), 둘은 섞일 수 없다(理氣不相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고봉은 이기가 함께 발하여(理氣共發說), 둘은 떼어낼 수 없다(理氣不相離)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다. 이것이 유명한 사칠 논변이며, 조선 철학사상사의 백미를 장식한 '퇴고논쟁(退高論爭)'이다. '어찌 물속의 달에 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달의 그림자가 고요하고 맑게 흐르는 물에 비친 경우에는 비록 달을 가리켜 그것의 일렁임을 말하더라도 물의 일렁임이 그 안에 있다…' 고봉의 편지는 이런 빛나는 은유와 간결함, 깊은 철학적 사유, 논리적 명료함, 젊음의 열정 등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명문이다. 퇴계는 주자의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때는 16세기 후반, 사화와 당쟁, 음모와 살육이 절정에 달하던 때다. 높은 도덕률이 필요했다. 칠정이 난무하는 진흙탕의 인간세상, 그것을 구원하기 위한 사단이라는 도의 경지. 인욕의 절제와 수양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절대 선의 세상을 별도로 설정하려고 했다. 철학의 궁극적 지점, 그것은 아마도 신성(神性)일 것이다. 영원불멸의 어떤 신성한 것, 그것이 있는가?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있음'에서 출발한 것이 기독교이고, '없음'에서 출발한 것이 불교라고 구분 한 바 있다. 퇴계는 인성 속에서 신성을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칠정의 범속한 감정을 초월하는 사단의 고결한 영역, 인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순선(純善)의 경지, 그것은 따로 존재하며, 그곳에 가야한다. 그것이 그의 이상이며 유학을 유교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매트릭스(matrix)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고산서원

퇴고논쟁은 퇴계를 이은 우계 성혼, 고봉을 이은 율곡 이이의 '율우논쟁(栗牛論爭)'으로 심화 발전한다. 전자는 주리론으로 영남학파, 후자는 주기론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한다. 이기론은 조선의 학자치고 여기에 붓을 들지 않은 학자가 없을 만큼 조선 철학사의 양대 산맥이며 최대 쟁점이었다. 이 논쟁은 조선후기 들어 더욱 극단화하는 유리론(唯理論)과 유기론(唯氣論)으로 나뉜다. 그 즈음 혜성처럼 등장하는 또 하나의 거목이 있었으니, 300여년에 걸친 이 논쟁을 극복하고 독창적인 이(理)의 체계를 수립한 노사 기정진(1798~1879)이다.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이 시 한 구를 내보이며 댓구(對句)를 청하였다. 실력을 떠보는 것이다. '용단호장(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관료들이 머리를 맞대어도 알 수가 없다. 급기야 신동으로 이름난 기정진을 찾는다. 그는 담박에 댓구를 쓴다. '화원서방(畵圓書方 九月山中春草綠)' 그리면 둥글고 글로 쓰면 모가 난다? 선문답 같다. 용호는 시간이다. 용은 진시(辰時), 오전 7시 즈음. 호랑이는 인시(寅時), 새벽 5시 무렵이다. 용은 겨울 해 뜨는 시간으로 겨울 해는 짧다. 호랑이는 여름 해 뜨는 시간으로 여름 해는 길다. 답은 해다. 해는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면 모가 난다(日). 이 명쾌한 답을 들고 갔더니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 '장안의 많은 눈들이 장성의 외눈만 못하다(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것이 '문불여장성 (文不如長城)'의 출처라는 재미난 일화다.

기정진은 순창에서 나서 장성에서 자랐다. 6세에 천연두를 앓아 왼쪽 눈을 잃었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고 한다. 10대 초반 경학서와 역사서까지 두루 통독했다. 1831년 33세에 사마시에 장원을 차지했다. 그의 관직생활은 1842년 전설사 별제로 6일 근무한 것이 전부다.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호조참판 등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는 사승(師承)이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 주요 저작으로 40대에 쓴 '납량사의', 50대의 '이통설(理通說)', 그리고 80세에 발표한 '외필(猥筆)' 등이 꼽힌다.

그는 이(理)를 씨앗에 비유했다. '이 세상에 씨앗 없이 생겨난 것은 아직 없었다. 리여! 리여! 모든 것의 씨앗이로다!'라고 했다. "이가 기의 근원이며, 기발이 곧 이발이요, 기행이 곧 이행"이라 했다. "음양 동정이 겉으로는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것 같으나 살펴보면 오직 천명이고, 그것은 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의 이론들을 비판 종합하면서 유리론(唯理論)이라는 독창적인 영역을 정립했다.

1866년 병인양요는 서양의 첫 침입이었다. 그의 나이 68세. 그는 '병인소(丙寅疏)'라 불리는 여섯 항의 상소를 올린다. 조정의 계획을 미리 세우고, 널리 의견을 구할 것, 외교언사를 세련되게 하고, 군사를 조련하며, 내부정비를 통해 외침에 대비할 것 등의 내용이다. 나라가 기우는 병자수호조규(1876)로부터 10년 전, 을사늑약(1905)으로부터 40년 전이다. 이 소(疏)가 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뿌리다. 위정은 성리학적 질서이고, 척사는 타 종교사상의 배척이다. 중국 화이사상(華夷思想)이 원류다. 세상을 우열로 양분하는 배타적 보수적 사상으로 분명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망국의 문전에서 이 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로 승화되었고 훗날 기삼연이 의병의 깃발을 세우고 민중의 항일운동을 점화하는 한말 조선의병사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기정진은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81세의 긴 생애 동안 벼슬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몰두한 학자였다. 78세이던 1875년 오늘의 '고산서원'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하여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을 짓고 1879년 생을 마치던 날까지 책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학문을 이은 노사학파가 6천여 명에 이른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그는 비가 내리되 비를 맞지 않는 공리공담(空理空談)의 관념론에서 벗어나 온 몸으로 비를 맞으며 시대적 문제를 고민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노사 기정진을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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