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겠습니다"···42년이 지나도 이어지는 추모 발길

입력 2022.05.18. 13:43 이예지 기자
오월 영령 안장된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역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 발길 이어져…'북적'
추모객 헌화·분향하며 참배…'전두환 비석' 밟아
18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역을 찾은 추모객이 희생자 묘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그때 용기내지 못한 비겁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민주화를 향한 열사들의 열망과 오월의 광주를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은 18일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역(구묘역)은 광주의 아픔을 잊지 않고 위로하기 위한 추모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18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역에 추모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묘역 내부에는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꼭 안은 채 혼자서 이곳을 찾은 시민부터 친구들과 함께 참배하러 온 대학생과 단체 추모객까지, 잠들어있는 오월 희생자 영령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이날 오전 9시께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3묘원.

묘역으로 향하는 길목에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듯 새하얀 꽃잎이 풍성하게 핀 이팝나무가 서 있었다. 마치 하얀 쌀밥처럼 하얗게 피어 있어 5월 당시 주먹밥을 함께 나누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18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역을 찾은 추모객이 희생자 묘비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이팝나무를 지나 묘역 안에 들어서자 5·18 민족민주열사와 희생자 개개인에 대해 설명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옆으로는 오월의 아픔을 글로 담은 '오월문학제' 시화 걸개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추모객들은 묘역 일대에 수놓아진 시화 걸개를 보며 1980년 5월 희생자들이 가묘 형태로 안장돼 있는 묘역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드문드문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추모객들은 전두환 비석을 밟고 지나가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월 영령에 참배했다. 미리서 준비해 온 꽃다발과 조화를 묘비 앞에 헌화하는 추모객부터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향초를 피워 분향하는 추모객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열사들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묘비 옆에 놓여 있는 열사들에 대한 설명문을 읽으면서 이내 고개를 떨궜다. 일부는 빛바랜 묘비를 닦으며 두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18일 오전 한 시민이 광주 북구 망월동민족민주열사묘역에 전시된 '오월문학제' 시화 걸개를 보고 있다.

한 시간 지났을까. 10여명 이상의 단체 추모객들이 이곳을 찾아오면서 묘역은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며 오월의 정신을 되새겼다.

10년째 5월 18일이면 이곳 묘역을 찾는다는 이승남(61)씨는 "5·18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다. 5월 16일 진행된 화형식에는 참여한 후 시위에도 참여하려고 했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보낼 수 없다며 만류하는 어머니의 손길을 저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두려움에 비겁하게 숨어버렸다"며 "26일 저녁 '광주 시민 여러분, 공수부대가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라는 가두방송을 듣고 이불 속에 숨어버린 그때의 나를 생각하며 늘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다"고 말끝을 흐렸다.

이처럼 그는 함께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늘 오월의 광주를 잊지 않고 지냈다. 이씨는 "이후 타지로 이사를 가면서 묘역을 참배하지는 못했지만 늘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자 주변 사람들에게 오월의 광주에 대해 알렸다. 2013년 다시 광주로 돌아오면서 해마다 이곳을 찾는다"면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불의에 항거하는 5·18 정신 계승을 위해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이 이뤄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한 손에 국화꽃을 쥔 채 혼자서 오월 영령의 묘비 앞에서 한참을 묵념하던 강모(44)씨는 "대학 재학시절, 풍물놀이패 활동을 하며 매년 이곳을 찾아왔는데 다른 지역에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찾아오지 못했다"며 "아이들이 오늘이 5·18민주화운동이 있었던 날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차 싶었다. 그 어떤 날들보다 잊어선 안 되는 이 날을 잊고 지내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일찍 이곳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타지에서 근무하던 사회초년생 시절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전국민들이 5·18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씨는 "경상도에서 온 한 동료가 '아직도 도청에 핏자국이 남아있나. 광주에는 지금도 빨갱이가 있지 않냐'라며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이렇게 설명 들었다'고 말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로 5·18에 대해 이야기하며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으려 했다"며 "아직도 광주의 오월은 창살 없는 투명한 감옥 속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하루빨리 제대로 된 오월의 역사를 전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자리와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예지기자 foresigh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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