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7김치홍
을사늑약 후 고향 영암서 거병
심남일 휘하 호남의소 기군장
박민홍·박사화 부대 옮겨가며
대규모 부대 편성 일본군 압도
고향 시종면 의홍사 공적 기려

영암에는 의병장을 모시는 사당이 셋 있다. 을묘왜변 때 의병을 일으킨 양달사 의병장을 모신 남암정, 임진왜란 때 거병해 용전분투하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전몽성 의병장을 모신 장동사, 그리고 한말 영암 의병을 빛낸 김치홍 의병장을 기린 의홍사다. 이번 남도 의병 열전에서는 영암 출신 의병들을 이끌며 한말 남도 의병의 주축을 형성했던 김치홍 의병장을 살펴본다.

◆ 영암 의병 중심된 호남의소
한말 영암 출신 의병들은 남도 의병의 주축을 형성하고 '호남창의소'를 결성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07년 12월 전남 지역 일본 수비대 배치 상황을 보면 대구에 14연대 본부가 있고, 광주에 2대대 본부, 그리고 진안, 남원, 순창, 정읍, 고창, 영광에 각 1개 소대가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후인 1908년 5월, 전주에 임시 파견기병대 본부대대가 배치되고, 영암, 광주, 고부에 각 기병 1개 중대가 배치된다. 영암에 기병중대가 배치된 것은, 1908년 봄에 영암 의병부대가 활발히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함평에서 거병한 심남일이 영암으로 이동한 것은, 어느 지역보다 체계적으로 움직이던 영암 의병을 토대로 의병부대를 새롭게 결성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호남의소'의 결성 배경이다.
많은 영암 의병 가운데 김치홍 의병장이 주목된다. 그는 남도 의병의 특징인 '연합의진'의 귀재였다. 본관이 김해로, 1880년 영암군 종남면(현재 시종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동필(東弼), 호는 신강(新江)이었다.
그는 을사늑약과 고종의 강제 퇴위 등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영암 주둔 일본군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심남일이 총사령관이 된 '호남의소' 기군장이 됐다.

◆국사봉서 치열한 혈전
김치홍의 활약상은 수많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결문에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피고(김치홍)는 폭도 수괴 심남일이 총기 50자루를 휴대한 폭도 6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8년 10월 2일 그의 부하로 가입해 그의 지휘를 받아 영암군 및 능주를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민홍이 총기 15자를 휴대한 폭도 3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9년 1월 11일 그의 부하가 돼 제1초십장이 돼 수괴 박민홍의 지휘를 받아 총기를 휴대하고 나주군을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사화가 총기 12자루를 휴대한 폭도 약 26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그의 부하가 돼 제1초십장이 돼 박사화의 지휘를 받아 영암을 휘젓고 다녔다. (하략) 명치 43년(1910년) 형구 제108호)'
판결문에는 심남일 부대의 기군장 김치홍이 박사화 의병부대의 제1초십장, 박민홍의병부대의 제1초십장이라고 나와 있다. 김치홍이 심남일·박사화·박민홍 의병부대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중요한 직책을 수행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독립의진을 형성한 의병부대들이 합진을 자유롭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독립 의진을 형성했을 때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으나 유사시에는 합진해 대규모 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우선 숫자에 크게 밀렸기 때문에 규모에서 밀린 일본군이 우리 의병부대와 전투하는데 쩔쩔맸다.
이때의 전투 상황을 기록한 일본군 전투 일지이다.

'소관(일본군)은 일·한 순사·헌병 합동의 한 부대를 인솔해 정오 남평군 죽곡면 선동에 도착한 바, 수괴 박사화·박민홍·강무경이 인솔하는 약 250명의 폭도가 선동 배후의 덕룡산이라고 칭하는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은 천험의 지리와 다수를 믿고 완강히 저항했다. 교전한 지 3시간 후 드디어 남쪽 영암군 방면으로 궤란시켰다. 전날(25일) 적과 충돌한 덕룡산에는 폭도가 아직 진지를 구축, 집단의 모양이 있음에 의해 소관은 26일 (일본) 순사 10명, 한(韓) 순사 5명을 인솔하고 나주 헌병소 근무 상등병 3명·보조원 2명과 함께 토벌을 위해 급히 덕룡산과 약 1km 떨어진 구릉에 이르렀을 때 덕룡산 정상에서 우리 부대를 향해 빈번히 발포하고 또 때로는 대포를 발사해 완강히 저항하므로 산개했다.(하략)(나경비발212호)'
덕룡산에서 의병들이 포대를 설치해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덕룡산은 남평, 영암, 강진에 걸쳐 있는 요충지인 이곳에 의병들이 포대를 설치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덕룡산의 정상을 국사봉이라고 한다. 국사봉에 호남의소 사령부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군 진중일지에도 의병이 일본군에서 대포를 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위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합진을 꾸려 일본군에 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이때의 전투 상황을 복원해 보았다.
1909년 2월 26일 박사화, 박민홍 의병 연합부대는, 25명의 일본 토벌대 및 나주경찰대와 영산포 근처 철천에서 무려 3시간 교전하다 영암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이들 부대를 일본군은 영암수비대 11명, 해남 수비대 17명 등 28명을 동원해 포위 공격했고, 이튿날인 2월 27일 영암수비대 11명이 박민홍 의병부대를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해남수비대까지 동원하는 등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박민홍의 아우 박여홍 등 20명의 의병이 장렬한 전사를 했다. 무려 3일간 일본군과 전면전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거성동서 대규모 연합작전
'심남일 일기'에도 이 무렵의 전투과정에서 이루어진 분진과 합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해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은 즉, 여러 개의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략)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했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 이대극, 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했다.(남평 거성동 접전)"
남평 거성동 전투에 독립 의병부대들이 총집결해 연합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영광 법성포 주재소를 의병부대가 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부대 등 호남창의회맹소에 속한 독립 의진이 연합작전을 펼친 것도 이러한 분진과 합진의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의병부대가 독립부대를 곧 분진을 유지하다가 유사시에 '연합'으로 합진을 구성한 것은 부대 운영의 효율성과 함께 유사시 피해 부대의 복구를 신속히 하려는 의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8월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8월 폭도세력 비교표'를 보면 심남일 부대원 숫자가 전월 '200명', 본월 '200명' 차이가 없다, 전월에 일본군과 2차례, 본월에 1차례 등 총 3차례나 전투를 해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총원의 변동이 없다는 것은 의병부대의 결원이 곧 보충됐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남도 의병의 특징인 '합진'은, 남도 의병이 강한 전투력을 형성해 일본군과 전남 곳곳에서 24개월 동안 밀리지 않은 전투를 380회 이상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합진'의 귀재로 빛나는 전공을 세운 김치홍은, 전투 중 불행히도 체포돼 1910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 대구공소원에서 7월 23일 항소 기각돼 형장에서 순국했다. 1990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0년 그의 고향인 영암군 시종면에 '의홍사'라는 사당을 세워 공적을 기리고 있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김세용교수“호남권 연결, 올인원 생활권 대두”
김세용 고려대 건축학부교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공간복지 정책 설계 전문가이다.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와 경기주택도시공사(GH) 사장을 연달아 역임했던 김교수는 청년·노년층 대상 주거 확충에 방점을 찍으면서 서울시와 경기도의 유휴부지·공공청사 개발, 지분적립형 정책을 총괄했다.김세용 교수는 지난 5일 광주경영자총연합회 초청 금요 조찬 포럼에서 ‘20세기 도시를 넘어서 인구에 따른 도시 재구조화 방향’을 주제로 현장 경험을 살려 인구 소멸시대 지방도시 경쟁력을 이야기했다.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에 대응할 새로운 미래도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미래도시는 MZ세대의 요구에 맞게 설계가 필요함을 차근차근 풀어냈다.김교수는 우선 한국사회가 경험하는 저출산 현상을 단순한 인구문제를 넘는 사회적 변화로 진단했다. 고령화 저출생에 의한 표피적 현상만 맞춘 처방이 유효하지 않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출산한 가정에 대한 사회적 지원체계는 여전히 부족하다”며 “육아와 주거, 복지정책이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중심으로로 설계돼 있어 현실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거론했다. 즉 현대 사회에서 가족관계 구성 형태가 복잡 다양해지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 틀에 맞추다보니 결과적으로 정책 미스매치가 많다는 얘기로 해석된다.또한 김교수는 “지난 30년 동안 전체 인구는 증가했지만 증가분 대부분이 인구 50만 명 이상 도시로 집중됐다”며 “20만 명 이하 중소도시는 오히려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교육과 문화, 의료 등 주요 서비스가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인구 역시 함께 이동하는 구조가 형성, 지방 침체의 악순환이 되고 있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특히 김교수는 호남권 도시 경쟁력과 관련, 광주와 전주를 언급하며, 지방 거점도시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도시 미래상으로는 ‘올인원(All-in-One) 생활권’을 제시했다.그는 “최근에는 먼 거리를 이동하기보다 집과 가까운 생활권 안에서 소비와 여가, 업무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카페 이용이 늘어나는 것도 단순히 커피 소비 증가 때문이 아니라 지역 내 머물 공간이 부족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했다.이어 “급속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공공이 제공해야 할 커뮤니티 공간과 생활 기반시설 공급이 충분하지 못했다”며 “앞으로는 동네 단위의 생활환경 개선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이와관련 김교수는 경기주택도시공사(GH) 사장 재직 당시 공공청사와 유휴시설을 활용해 청년 및 1~2인 가구용 주택을 공급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기존 공공시설을 복합화해 주거와 생활서비스를 결합하는 방식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경찰서와 파출소 상부 공간을 활용한 여성안심주택 공급 사례를 소개하며 “현재 정부도 유사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 · 안선순 광주예총 사무처장 시인 등단
- · (K-여행 성지, 여수) 글로벌 복합해양관광도시로 거듭난다
- · 갈등의 시대에 울려퍼지는 워낭소리
- · 광주비엔날레 파리 씨떼 입주 작가에 정유승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