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세력-쿠데타 주역 단일화 협상
한국 정치사 이례적 실험 대선 승리
공동정부 김종필·박태준 국무총리로
자민련 출신 장관들 호흡 IMF 극복
내각제 포기·남북문제 견해차로 결별
EU·美 연합정치 복지국가·국민통합
DJ연합정치 난국 풀어갈 지혜되기를
2024연중기획 탄생100년 DJ를 그리다 1부-김대중과 통합정치 ③김대중의 연합정치 실험과 그 함의
1948년 정부 수립 후 구성된 초대 내각은 정파를 초월한 거국 내각의 성격을 띠었다. 보수적 성향의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았지만, 장관 중에는 과거 공산주의에 가담했던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 농림부 장관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장관들은 대부분 자기가 소속한 정당을 대표하기보다는 개인적 명망성을 바탕으로 내각에 참여했다.
우리 역사에서 정당과 정당이 협약을 맺고 정부를 함께 구성한 것은 1998년 출범한 김대중·김종필(DJP) 공동정부가 유일하다. DJP 연합은 한국은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혹은 소선거구제를 토대로 한 거대 양당제 국가이기 때문에 연합정부 구성이 어렵다고 말한 통념을 깨뜨렸다.
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출현한 일차적 배경은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한 선거연합이었다. 반 김영삼 정서가 강했던 김대중과 김종필은 1996년 9월 실시된 서울 노원구청장 선거에서 자민련 출신 김용채를 사실상 단일 후보로 내세우면서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1997년 대선 국면이 본격화되자 연합의 성격이 격상됐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 후보 간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된 것이다. 민주 세력인 김대중과 5·16 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김종필 사이의 단일화 협상은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실험이었다. 당연히 김대중이 이끈 새정치국민회의 내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김대중은 현실 정치에서 소신과 명분도 중요하지만, 현실적 선택도 중요하다면서 반대 운동을 진정시켰다.
국민회의 측에서 한광옥, 자민련 측에서 김용환이 협상 대표를 맡았다. 여론조사에서 앞선 김대중이 단일 후보가 되는 데는 이론이 없었다. 문제는 국민회의 측이 자민련에 어떤 반대급부를 제공하느냐였다. 김종필은 과거부터 내각제 하의 총리를 희망했다. 김영삼과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김영삼이 내각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측은 협상 결과 김대중을 단일 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 임기 중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데 합의했다.
양 김의 단일화와 연대는 언론에서 김대중의 영문 이름 머리글자인 DJ와 김종필의 JP를 합성한 DJP 연대로 불렸다. 나중에 DJP 연대에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이 가세했다. 선거 때마다 색깔 공세에 시달렸던 김대중의 처지에서 김종필·박태준이라는 거물 보수 정객은 매우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김종필은 충청 지역을 대변했고, 박태준은 영남에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 결과 김대중과 이회창의 표차는 39만557표(1.53%)에 불과했다. 막상막하의 승부였다.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 이인제의 출마에 따른 여권의 분열, DJP 연대, IMF 사태, TV 토론 등 김대중에게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선거 결과가 이렇게 박빙으로 끝난 것은 한국에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준 징표였다. 또 이것은 민주개혁 진영의 선거 환경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DJP 연대는 김대중의 승리와 수평적 정권교체에 매우 비중 있는 응원군이 됐다. 그 외에도 김대중·김종필 정치 연합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첫째,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연합이었다. 둘째, 민주 개혁파와 보수 우파의 이념 연합이었다. 셋째, 지역 연합이었다.
◆연합정부 실험의 소중한 경험
김대중 정부는 국회 의석수가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소수 정부였다. DJP 연합은 IMF 위기 상황에서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공동정부 하에서 김대중은 김종필 총리의 역할과 위상을 최대한 존중했다. 김종필은 자민련 출신 장관의 사실상 임면권을 행사하는 실세 총리였다. 자민련 출신 경제부처 장관들도 김대중과 호흡을 잘 맞추었다.
김대중 정부의 최대 과제는 IMF 위기 극복이었다. 정부 출범 직후 IMF 위기 극복을 최전선에서 지휘한 이규성 재경부 장관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자민련에서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자민련에 경제부처 등 알짜 부처가 돌아갔다. 명실상부하게 공동정부 형태를 띠었다. DJP 공동정부 하에서 자민련 출신 총리는 김종필(1998년2월~2000년1월), 박태준(2000년 1~5월), 이한동(2000년5월~2002년7월) 등 세 명이었다. 이한동 총리의 경우 DJP 공동정부가 무너진 2001년 9월 이후에도 10개월 동안 총리 자리에 더 머물렀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민련 출신 장관들을 가리켜 "저력이 있었고, 경제위기를 돌파하는 데 적임이었다"라고 평했다. 그는 자민련 출신 경제부처 장관들이 자신과 호흡을 잘 맞추었으며, IMF 위기 극복에서 조기에 성과를 내게 된 데에는 자민련 소속 장관의 헌신적인 노력도 큰 몫을 했다고 평가했다. 1998년 2월부터 2001년 9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지속한 공동정부는 기간으로 보나 성과에서 성공적이었고 소중한 실험이었다.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정당과 정당 연합의 공동정부는 어렵다는 논리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DJP 공동정부에는 한계도 있었다.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형성된 정치 연합이었는데 내각제 개헌에 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김종필은 내각제를 포기할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자민련 지도자만의 길을 걸을 것인가, 국가 운영을 책임진 자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갈림길에서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이처럼 내각제 포기는 김대중이 제안하고 김종필이 동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공동정부의 운명에는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내각제가 공동정부 출범의 가장 큰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에서 개운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DJP 공동정부가 무너진 주요 계기가 남북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 즉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둘러싼 갈등이었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공동정부가 무너진 2001년 9월은 햇볕정책의 성과가 널리 공유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동정부가 유지된 3년 8개월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또 성과 등으로 보더라도 DJP 공동정부에는 긍정적 요소가 많았다. 또 김대중 정부 때 이루어진 노사정 대 타협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회통합의 좋은 모델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정부의 성공은 이처럼 정치, 사회, 국민통합의 결과물이었다.
현재의 우리 정치는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극한적 대립을 보이면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루고, 이것이 일반 국민에게로 확산되어 국민통합 저해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양당 모두 당내 민주주의에서도 낙제점을 받고 있다. 이런 정치 환경을 보더라도 정치적 이념과 성격이 다른 두 정파가 연대하여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일차적 목표를 이루고 다시 공동정부를 통해 IMF 위기 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의 모델을 제시한 것은 현재의 정치 구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줄 것이다.
◆연합정치는 권력 구조와 별개의 문제다
1949년 서독 정부가 들어선 후 1990년 독일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41년의 역사에서 단일 정당이 정권을 잡은 것은 딱 4년뿐이었다. 그들은 성향이 다른 정파 간의 연합 하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통일까지 달성했다. 모두 내각제 국가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핀란드 등 유럽의 다른 대부분 국가도 연합정부를 통해 복지국가의 모델을 만들었다.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연합정부의 사례가 있다. 1860년대 남북전쟁 시기에 미국을 이끈 링컨 대통령은 당내 라이벌들은 물론이요 반대당인 민주당의 막강한 경쟁자들까지 내각에 참여시켰다. 링컨연합은 남북전쟁에 맞선 연방 유지와 승리의 정치 연합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미국을 이끈 루스벨트 대통령도 연합정부를 구성해 위기를 극복했다. 루스벨트 정부는 자유주의 정부가 노동·농민·흑인 빈민세력과 연합한 미국판 자유-노동 연합, 자유-사민 연합에 해당했다. 심지어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 흑백연합을 구성해 수백 년 동안 대립했던 흑백 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의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 앞에는 저출산과 인구감소, 남북대립과 전쟁위협, 국가 간의 무한경쟁과 경제위기, 기후 위기와 그린 산업구조로의 전환 필요성, 교육 개혁, 연금개혁 등 수많은 과제가 놓여있다. 이 과제들을 어떻게 풀고 대처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나라 정치권은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했던 연합정치와 국민통합의 사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합정치 사례가 현재의 난국을 풀어나가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지혜가 되기를 바란다.
최영태(전남대 명예교수, 한반도 미래연구원장)
최영태 교수는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전남대에서 5.18연구소장, 교무처장,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시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광주흥사단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광주도시철도 2호선공론화위원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독일통일의 3단계 전개과정',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등이 있다.
- 교평 조건부 통과···'더현대 광주' 속도낼지 주목 더현대 광주 조감도. 옛 전방·일신방직에 들어서는 '더현대 광주'가 31일 광주시 교통영향평가 심의를 조건부로 통과했다. 앞서 사업지 내 '셋백' 구간의 기부채납 문제로 심의에서 한차례 막히면서 타임라인에 차질을 빚었던 더현대 광주가 이번 조건부 심의를 받아들이고 추진에 속도를 낼지 주목된다.31일 광주시에 따르면 광주시 교통영향평가심의위원회(교평위)는 이날 오후 '더현대 광주' 신축공사에 대한 교통영향평가 심의를 진행했다. 위원회는 사업장 진입을 위한 가감속차로(완화차로)인 셋백 구간의 기부채납과 자전거도로·인도의 일정 폭 유지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더현대 측은 광주시에 셋백 구간 150m 길이의 폭 0.25m를 기부채납하기로 했지만, 교평위가 이를 최소 1.25m까지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1차 교평 심의에서 요구한 150m 길이의 폭 3m와 비교해 다소 완화한 조건이다. 당시 더현대 측은 설계를 다시 해야 하고, 지하주차장 면적이 축소된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보였다.또 교평위는 자전거와 보행로 폭을 3m 이상 확보하고, 이 중 1.75m를 광주시에 기부채납하라고 요구했다. 복합쇼핑몰 준공 이후 3개월 사후 모니터 등으로 교통수요를 분석해 추가 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도 요청했다. 더현대 측이 제시한 차량 통행량보다 실제 통행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됨에 따른 것이다. 위원회는 이밖에 주차공간 분리, 교차로 시설 확충, 안전시설 보강 등 모두 9가지의 조건부 수용 결정을 내렸다.더현대 측이 심의 조건을 수용하게 되면 건축경관·공동위원회 심의 등 후속 행정절차를 밟아 나갈 예정이다. 사업자 측은 내부검토 이후 입장을 광주시에 전달할 방침이다. 사업자가 수용하지 않게 되면 교통영향평가에 대한 재심의가 이뤄진다.이삼섭기자 seob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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