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연중기획 탄생100년 DJ를 그리다 1부-김대중과 통합정치 ④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민족통합
남북연합 연방제 국가 완전통일
'3단계 통일론' 취임 후 구체화
금강산·개성공단 개발 이끌어
다단계 '김대중식 통일 방안'
남북공동선언으로 첫단추 성공
상호신뢰 조성 남북연합 시도
남북관계 다시 대결시대 복귀
전쟁은 한반도 문제 해법 못 돼
8천만 동포 DJ통일 상기할 것
김대중은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다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정보 통신 강국 건설, 문화·복지 국가의 초석 다지기 등 많은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못다 이룬 큰 꿈이 있었다. 그것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었다. 그는 햇볕정책을 통해 분단 극복의 중요한 토대와 비전을 제시했지만, 그가 목표한 만큼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5년이라는 짧은 임기와 북미 관계의 악화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21살 젊은 나이에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갈라지고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이념 투쟁 때문에 남북 분단이 공고화하는 것에 강한 분노와 아쉬움을 가졌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남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나의 신앙처럼 간직하며 살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민족은 1천년 이상 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남북 분단은 미국과 소련 등 외세의 잘못된 판단에 기인했으며, 우리 스스로가 통일을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남북을 갈라놓은 주변 강대국들도 남북한을 다시 하나의 국가로 복귀시켜야 할 책무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1967년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 유세를 하면서 그의 소원은 통일의 역군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토가 둘로 갈라졌다면서 이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절대로 영원한 자유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평화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포 시민들에게 자신이 이 나라 통일의 역군이 되고, 기둥이 되고, 길잡이가 되도록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 총리로 재임한 빌리 브란트는 과거의 동서독 대결정책과 결별했다. 그는 동방정책을 통해 동서독이 교류 협력하고 민족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공존공영하면 사실상 절반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평화 속에서만 가능하다면서 동구 공산권 국가와의 화해·협력정책을 추구했다. 김대중은 1960년대 말부터 브란트의 동서독 화해정책에 주목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김대중의 통일정책, 그리고 훗날 햇볕정책의 롤 모델(role model)이 되었다.
김대중은 통일의 필요성만 역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통일은 감상적인 희망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방안으로 3단계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3단계 통일론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처음 언급했다. 그는 1995년에는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이라는 책을 발간해 그의 통일관을 체계화했다. 그는 1995년 발간한 3단계 통일론에서 1단계는 남북연합, 2단계는 연방제 국가, 3단계는 완전 통일로서 그때 상황을 고려하며 신축적으로 임하자고 했다.
◆경제 통일 모델로서 개성공단
김대중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2개월이 지난 1998년 4월 말에 '남북 경제 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정경 분리 원칙에 따라 모든 기업인이 방북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었다. 생산설비의 무상 또는 임대 반출도 허용했다. 대북투자 상한선도 철폐했다. 기업인들이 자체 판단으로 대북 경협사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김대중 정부가 기업들의 대북 경협 자유화 조처를 한 지 2개월쯤 후인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트럭에 소 떼 500마리를 싣고 휴전선을 넘었다. 1차 소 떼 방북에서 정주영은 북측과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추진에 합의했다. 금강산 관광을 위해 장전항에 부두를 건설하는 데 1억 5천만 달러가 들어갔는데,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대북투자 상한선이 5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비롯한 대북 경협사업은 김대중 정부가 정경 분리 원칙을 표방하고 대북투자 상한선을 철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부터 현대그룹이 추진한 개성공단 사업은 배후도시 39.7㎢를 포함하여 총 66.1㎢(2천만 평) 규모의 산업공단을 3단계로 추진하여 8년 안에 완성한다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당시 개성 인구는 30만 명 내외였다. 현대 측은 이 건설 사업이 완성될 경우 필요한 노동력 수요가 35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보았고, 김정일에게 북한이 노동력 공급을 보장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정일은 "그때(8년 후)가 되면 남과 북은 평화 공존하며 군축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우리도 군대를 감축하여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김정일이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또 그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에곤 바르는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최측근 인사로서 동서독 화해정책인 동방정책의 설계자였다. 그는 브란트 정부에서 내독성 장관(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으로부터 개성공단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건(개성공단) 놀라운 상상력이요. 내가 동방정책을 설계할 때는 동독지역에 서독의 공단을 만든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개성공단을 확장해서 계속 따라가면 그 중간에 경제 통일이 올 것이고, 종점에 마침내 한반도의 통일이 올 것입니다."
에곤 바르의 말처럼 햇볕정책은 곧 통일의 과정이었다. 햇볕정책은 서독이 추진한 동방정책보다 더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이었다.
◆남북연합은 김대중식 통일방안
남북연합은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중 첫 번째 단계 통일과정에 해당한다. 남북연합은 남한과 북한이 국가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교류 협력하고, 공존공영하며 민족 동질성을 유지하고 다음 단계인 연방제 국가를 준비하기 위한 통일국가 형태다. 김대중이 3단계 통일론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남북연합 단계다. 김대중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연합을 향후 남북이 지향하는 통일방안으로 만들려 노력했고, 일정 부분 성공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통일방안으로 합의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남측이 제안한 국가연합이란 남북이 각기 주권을 보유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약에 의해 창설·운영되는 복수 국가의 협력체(기구)로 정의할 수 있다. 공동의 목표란 남북한 교류와 평화 기반 조성, 경제적 공동이익 추구, 통일을 위한 제반 조치 등을 말한다.
남북연합을 거쳐 연방제로 가는 다단계 통일정책은 동서독 통일이 가져온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우리식으로 소화해, 우리식으로 개발한 김대중식 통일방안이었다. 남북연합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반세기 동안의 불신을 넘어 상호신뢰 조성이 긴요하다. 햇볕정책은 남북연합 단계에 진입하기 위한 기반 조성 작업이었고 동시에 남북연합이 추진할 내용 그 자체였다.
예를 들면 남과 북은 6·15공동선언(제4항)을 통해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여러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합의했다. 김대중은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에 따라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평화적 공존 분위기를 만들면 남북연합제는 지금 당장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국제적 스포츠 행사에서 남북한 선수단의 공동입장과 단일팀 구성 등은 남북연합제하에서 가능한 협력사업을 미리 앞당겨 시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북문제는 냉전 논리와 극우 반공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다루기가 매우 어려운 주제다. 잘 진행되다가도 언제 어느 때 장애물에 봉착할지 예상하기가 어렵다. 또 남북 화해와 통일론자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김대중은 정치에 뛰어든 이후 2009년 서거할 때까지 반세기 동안 쉬지 않고 한결같이 남북 화해와 협력 등 통일방안 연구와 실천에 몰두했다. 그는 민족과 이념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념이 다르고 공산당은 반대하더라도 민족에 대한 애정과 공동 운명 의식은 견지해야 한다고 했다. 5차례의 죽을 고비도 그의 이런 신념을 꺾지 못했다. 그의 강한 신념과 용기 있는 행동은 그가 민족문제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신념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불행히도 남북 관계가 다시 김대중 정부 이전의 대결 시대로 복귀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이,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한반도 문제를 푸는 해법이 못 된다. 어느 시점이 되면 남북 모두 대결 국면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화해와 공존공영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그때 남북한 8천만 동포들은 김대중이 제시한 남북 화해와 협력, 통일의 비전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그가 추구한 국민 화해와 통합의 최고 단계인 남북한 8천만 동포의 민족통합론이었다.
최영태 전남대 명예교수·한반도 미래연구원장
- 이제 호남정치력 복원이다…광주·전남 총선이 남긴 과제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선거 당선자들이 1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참배 후 민주의 문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이제 호남 정치력 복원이다 현주소4·10 총선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광주·전남 정치권이 남긴 과제 가운데 호남정치력 복원이 첫 번째로 꼽힌다. 이에 본지는 22대 국회에서 호남정치력을 복원하기 위한 방안을 상, 중, 하로 나누어 진단해 본다.22대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지역민들의 관심은 단연 호남정치력 복원에 모아지고 있다. 이미 변방으로 전락한 호남정치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다선의원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비전을 선점하고 과감한 도전으로 호남정치력을 복원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다.22대 국회에서 호남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다선 의원들의 리더십과 솔선수범, 희생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 당선된 후보들의 면면과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호남정치력 복원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아직 기우일 수 있다. 향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와 2년 후 지방선거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22대 국회가 최악의 호남정치력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불명예를 뒤집어쓸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광주·전남의원 18명 가운데 11명이 초선으로 채워졌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해남·진도·완도)이 5선으로 호남 최다선이다. 이어 이개호 의원(담양·장성·함평·영광)이 4선, 서삼석 의원(영암·무안·신안)과 신정훈 의원(나주·화순)이 각각 3선이다. 주철현 의원(여수 갑)과 김원이 의원(목포), 민형배 의원(광주 광산을)이 재선으로 활약한다.호남정치력 복원은 결국 다선의원들이 주도해야 한다. 연륜과 경험을 볼 때 박 전 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박 전 원장은 오는 8월로 예정돼 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강력한 당권 후보증 한 명이다. 전국적인 인지도와 스킨십, 동물적인 정치본능까지 갖추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박 의원이 정치 9단이다 보니 지역적 대의보다는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우선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호남 최다선 이자 지역의 리더로서의 입지가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특히 2년 후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다선인 대부분의 의원들이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이개호, 서삼석, 신정훈, 주철현 의원 등이 모두 전남지사 선거에 뜻을 가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박지원 전 원장도 전남지사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대부분의 다선 의원들이 전남지사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호 견제와 경쟁심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지역적 의제보다는 다분히 자신들의 정치적 유불 리가 선행될 수밖에 없을지 우려된다.재선인 민형배 의원의 경우도 향후 최고위원 선거와 광주시장 출마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광주지역 유일한 재선의원 이기 때문에 정치적 역할과 리더십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광주·전남지역 다선의원들이 22대 국회에서 정국의 이슈를 주도하고 민주당의 중심에서 민주진영의 심장이었던 호남정치를 복원해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해 보인다.호남정치의 핵심은 호남이 민주당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호남지역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대전략과 추진력이 선행돼야 한다. 과거의 호남정치는 대세론에 편승, 가속도를 붙이는데 머물렀다. 이제는 대전환의 계기를 호남정치가 주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호남정치력 복원과 관련해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대화로 정치를 복원해 국회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호남정치의 존재감을 살리는데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이개호 의원은 "4선 중진의원으로서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고 호남정치를 복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의식, 개혁성, 포용력, 정책중심의 리더십을 계승해 호남출신의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치세력으로 거듭나도록 솔선수범 하겠다"고 밝혔다. 서울=강병운기자 bwjj238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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