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의 예술혼 깃든 그 섬엔 매화향 그윽하다

입력 2024.01.09. 16:40 김만선 기자
[1004섬 신안-1섬 1뮤지엄] ②임자도<상>
'조선문인화 영수' 조희룡 유배지
그의 생애와 섬 문화 관련 기록들
글·그림으로 다양하게 남아 있어
머나먼 섬에 갇힌 강한 불만·분노
시·서·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켜
우봉 조희룡이 3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임자도 이흑암리 '만구음관'.

[1004섬 신안-1섬 1뮤지엄②-임자도 <상>]

무슨 조화인지 모른다. 산방(山房) 내 화조도(花鳥圖) 속에 머물던 노란 나비 한 마리 그림 밖으로 날아오르더니 마당 한 편에 자리잡은 홍매화 꽃에 날개를 접었다. 청잣빛 하늘에 걸터앉은 새털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만큼은 게으른 하품이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에 손차양까지 하고 해찰의 여유를 부려본다. 노란 나비 한 마리 곁에는 어느새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고, 그렇게 서너 마리가 어우러지는가 싶더니 이를 시기하듯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포릉포릉 날갯짓을 하며 앙증맞게 지저귄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명지바람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홍매화를 툭툭, 건들고는 까닭 모르게 풀이 죽은 난초의 잎사귀 곁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다.

오지랖 넓은 명지바람은 어느새 손샅을 간지럽힌다. 때마침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만 보고 접어버리긴 아까워 적바림이라도 해야겠다, 작정하던 찰나였다. 일석산방(一石山房)에서야 매일 볼 수 있는 모습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 자연은 매년이 다르고,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이 다르다.

명지바람 몽니에 곱게 눈을 흘기며 종이부터 문진으로 누르려는데 귀익은 소리에 홀리듯 그만 눈을 빼앗긴다. 손자 녀석이 흙장난을 하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손자를 얼러 시험삼아 붓을 쥐어주고 마음껏 움직이게 해보았다. 굳이 필법이랄 것도 없었다. 손자는 제 마음대로 붓을 휘두르더니 결국 온통 먹을 채워 넣었다. 그 행동이 너무 사랑스러워 끌어안으니 이젠 수염을 끌어당겼다. 요 녀석보게, 허허허…. 손자의 재롱을 지켜보노라면 행복이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고 휘이~잉, 찬바람이 불더니 모든 풍경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일석산방도, 손자도, 매화도 모두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끝 모를 공포감에 단말마 같은 비명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윽, 으~~윽….

우~웅, 우~웅, 휘이~잉.

우봉이 유배지에서 느낀 두려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荒山冷雲圖(황산냉운도)'.

우봉(又峰)은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황소바람 소리를 듣고서야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까. 우봉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몸을 뒤척였다. 아마 자시(子時) 아니면 축시(丑時) 어디쯤일 것이다. 그는 밤이 무서웠다. 여름철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인데도 밤이 되면 집 뒤의 황량한 산 위에서 찬 밤바람이 불어오고 숲속에서는 귀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뿐인가 앞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여서 발을 내딛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봉은 '거친 산 찬 구름' 이라는 뜻의 그림 '荒山冷雲圖'(황산냉운도)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썼다.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친 산, 고목,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 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우봉 적거지 마을에는 홍매화 가지들이 꽃을 피워올리고 있다.

◆유배 3년간 시·서·화 모두 새 경지 승화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966)이 추사 김정희와 같은 계열로 알려져 전남 신안 임자도에 유배를 온 것은 1851년 8월로 그의 나이 63세였다. 헌종 재위 시절 안동 김(金)씨와 풍양 조(趙)씨는 서로 번갈아가며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헌종이 죽자 안동 김문은 강화도에서 이원범을 데려와 보위(철종)에 올렸고, 풍양 조씨 인맥에 압박을 가했다. 그들은 철종의 증조였던 진종(眞宗)의 위패를 어디다 봉안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달랐던 풍양 조씨 계열의 핵심 인물 영의정 권돈인을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그와 친했던 우봉과 추사, 오규일까지 대상이 확대돼 유배를 떠나게 됐다.

서울 태생의 우봉은 어릴 적부터 허약하고 병을 잘 앓았다. 몸이 허약하다보니 혼사가 쉽지 않았고, 나이 30에 머리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완전히 훤해졌다.

우봉이 그림을 시작한 시기는 30세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는 26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떠나보내면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 시기 건강을 잃은 그에게 주변에서 그림을 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구음관 아래에는 '묵죽도' 등 우봉의 여러 대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임자도에 유배된 우봉은 머나먼 섬에 갇힌 것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를 삭히기 위해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흑암리 바닷가 움막집에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집' 이라는 의미의 '萬鷗음(口+金)館'(만구음관)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는 두어 칸 되는 움막집을 세 부분으로 나눠 한 곳은 침소로, 또 한 곳은 부엌으로 쓰고, 나머지 부분은 화실로 만들었다.

유배 초기에 느꼈던 그의 울분은 점차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면서 시(詩)·서(書)·화(畵) 모두 새로운 경지로 승화됐다. 회령부사 김태와 친분을 쌓는가 하면 임자도 청년 홍재욱과 주준식에게 서화를 가르치고 저술활동에도 매진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을 통해 인정을 느끼게 됐고, 고기잡이 일과 사대부의 글공부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만구음관 아래에는 '매화도' 우봉의 여러 대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우봉은 만구음관에서 머무는 동안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 세계를 집대성한다. 만구음관과의 인연은 3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종문인화를 넘어서는 창조적 예술혼을 펼친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봉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정신은 '수예론'(手藝論)과 '불긍거후'(不肯車後)에 있다.

그는 당시 중국인들이 '그림에 앞서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가슴 속 이념을 벗어나 화가로서 손의 기량을 중시하는 '수예론'을 중시했다.

특히 당시의 흐름을 좇지 않는 독창적 예술을 강조한 '불긍거후(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음)'의 정신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하고 조선문인화의 시대를 개척한 자양분이 됐다.

만구음관에서 바라보면 마을 전경과 넓은 들판, 어머리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우봉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변화가 생겼다. 그는 문득 자신이 '임자도'라는 그림 속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만구음관은 물론 평소 가까이 하는 매화, 난초, 바위가 모두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봉 스스로도 그림 속의 한 사물이 됐고, 그림 속의 존재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니 그림 속의 그림, 곧 화아일체(畵我一體)의 경지까지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임자도에서 완성한 괴석도는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격이 드러났고, 거침없이 격렬하며 화려한 매화도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용매도'(龍梅圖)로 발전하며 더 이상 끌어올릴 수 없을만큼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조선문인화의 영수',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로 불리는 우봉 조희룡. 그의 적거지 만구음관은 진도 운림산방에 비유될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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