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인화 영수' 조희룡 유배지
그의 생애와 섬 문화 관련 기록들
글·그림으로 다양하게 남아 있어
머나먼 섬에 갇힌 강한 불만·분노
시·서·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켜
[1004섬 신안-1섬 1뮤지엄②-임자도 <상>]
무슨 조화인지 모른다. 산방(山房) 내 화조도(花鳥圖) 속에 머물던 노란 나비 한 마리 그림 밖으로 날아오르더니 마당 한 편에 자리잡은 홍매화 꽃에 날개를 접었다. 청잣빛 하늘에 걸터앉은 새털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만큼은 게으른 하품이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에 손차양까지 하고 해찰의 여유를 부려본다. 노란 나비 한 마리 곁에는 어느새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고, 그렇게 서너 마리가 어우러지는가 싶더니 이를 시기하듯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포릉포릉 날갯짓을 하며 앙증맞게 지저귄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명지바람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홍매화를 툭툭, 건들고는 까닭 모르게 풀이 죽은 난초의 잎사귀 곁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다.
오지랖 넓은 명지바람은 어느새 손샅을 간지럽힌다. 때마침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만 보고 접어버리긴 아까워 적바림이라도 해야겠다, 작정하던 찰나였다. 일석산방(一石山房)에서야 매일 볼 수 있는 모습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 자연은 매년이 다르고,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이 다르다.
명지바람 몽니에 곱게 눈을 흘기며 종이부터 문진으로 누르려는데 귀익은 소리에 홀리듯 그만 눈을 빼앗긴다. 손자 녀석이 흙장난을 하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손자를 얼러 시험삼아 붓을 쥐어주고 마음껏 움직이게 해보았다. 굳이 필법이랄 것도 없었다. 손자는 제 마음대로 붓을 휘두르더니 결국 온통 먹을 채워 넣었다. 그 행동이 너무 사랑스러워 끌어안으니 이젠 수염을 끌어당겼다. 요 녀석보게, 허허허…. 손자의 재롱을 지켜보노라면 행복이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고 휘이~잉, 찬바람이 불더니 모든 풍경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일석산방도, 손자도, 매화도 모두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끝 모를 공포감에 단말마 같은 비명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윽, 으~~윽….
우~웅, 우~웅, 휘이~잉.
우봉(又峰)은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황소바람 소리를 듣고서야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까. 우봉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몸을 뒤척였다. 아마 자시(子時) 아니면 축시(丑時) 어디쯤일 것이다. 그는 밤이 무서웠다. 여름철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인데도 밤이 되면 집 뒤의 황량한 산 위에서 찬 밤바람이 불어오고 숲속에서는 귀신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뿐인가 앞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여서 발을 내딛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봉은 '거친 산 찬 구름' 이라는 뜻의 그림 '荒山冷雲圖'(황산냉운도)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썼다.
'외로운 섬에 떨어져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친 산, 고목, 기분 나쁜 안개, 차가운 공기 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필묵에 담아 종횡으로 휘둘러 울적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유배 3년간 시·서·화 모두 새 경지 승화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966)이 추사 김정희와 같은 계열로 알려져 전남 신안 임자도에 유배를 온 것은 1851년 8월로 그의 나이 63세였다. 헌종 재위 시절 안동 김(金)씨와 풍양 조(趙)씨는 서로 번갈아가며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헌종이 죽자 안동 김문은 강화도에서 이원범을 데려와 보위(철종)에 올렸고, 풍양 조씨 인맥에 압박을 가했다. 그들은 철종의 증조였던 진종(眞宗)의 위패를 어디다 봉안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달랐던 풍양 조씨 계열의 핵심 인물 영의정 권돈인을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그와 친했던 우봉과 추사, 오규일까지 대상이 확대돼 유배를 떠나게 됐다.
서울 태생의 우봉은 어릴 적부터 허약하고 병을 잘 앓았다. 몸이 허약하다보니 혼사가 쉽지 않았고, 나이 30에 머리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완전히 훤해졌다.
우봉이 그림을 시작한 시기는 30세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는 26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떠나보내면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 시기 건강을 잃은 그에게 주변에서 그림을 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자도에 유배된 우봉은 머나먼 섬에 갇힌 것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를 삭히기 위해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흑암리 바닷가 움막집에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집' 이라는 의미의 '萬鷗음(口+金)館'(만구음관)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는 두어 칸 되는 움막집을 세 부분으로 나눠 한 곳은 침소로, 또 한 곳은 부엌으로 쓰고, 나머지 부분은 화실로 만들었다.
유배 초기에 느꼈던 그의 울분은 점차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면서 시(詩)·서(書)·화(畵) 모두 새로운 경지로 승화됐다. 회령부사 김태와 친분을 쌓는가 하면 임자도 청년 홍재욱과 주준식에게 서화를 가르치고 저술활동에도 매진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을 통해 인정을 느끼게 됐고, 고기잡이 일과 사대부의 글공부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우봉은 만구음관에서 머무는 동안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 세계를 집대성한다. 만구음관과의 인연은 3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종문인화를 넘어서는 창조적 예술혼을 펼친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봉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정신은 '수예론'(手藝論)과 '불긍거후'(不肯車後)에 있다.
그는 당시 중국인들이 '그림에 앞서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가슴 속 이념을 벗어나 화가로서 손의 기량을 중시하는 '수예론'을 중시했다.
특히 당시의 흐름을 좇지 않는 독창적 예술을 강조한 '불긍거후(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음)'의 정신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하고 조선문인화의 시대를 개척한 자양분이 됐다.
섬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우봉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변화가 생겼다. 그는 문득 자신이 '임자도'라는 그림 속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만구음관은 물론 평소 가까이 하는 매화, 난초, 바위가 모두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봉 스스로도 그림 속의 한 사물이 됐고, 그림 속의 존재가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니 그림 속의 그림, 곧 화아일체(畵我一體)의 경지까지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임자도에서 완성한 괴석도는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격이 드러났고, 거침없이 격렬하며 화려한 매화도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용매도'(龍梅圖)로 발전하며 더 이상 끌어올릴 수 없을만큼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조선문인화의 영수',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로 불리는 우봉 조희룡. 그의 적거지 만구음관은 진도 운림산방에 비유될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 깊은 주름, 굳은살에 배긴 삶··· 예술이 되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각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살이'를 듣고 함께 소통하며 이를 그림으로 담는 작업을 하던 것이 계기였다. 신안 자은도 둔장마을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제주도 같은 '섬 아닌 섬'을 제외하고는 처음 찾은 섬이었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으로 무장한 주변인들의 걱정은 더욱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신안의 섬이 무려 1천 개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섬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큰 장벽은 주민과의 소통이었다. 주어진 생업에 묵묵히 땀흘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은 접촉과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화가-주민 어우러진 그림그리기 프로그램어쩌면 필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가는 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행 가방을 풀었다. 화가가 필연을 생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섬 주민이 어설픈 이방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면서부터였다. 화가와 섬 주민은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만나게 돼 있었던 사이처럼 금방 친해졌다. '섬'과 '섬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화가가 이태에 걸쳐 섬을 찾고, 그 이듬해에도 섬을 찾으면서 더욱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화가는 어느 사이 섬 주민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화가는 섬을 찾기 위해 여행가방을 싸는 시간이 행복해졌다.화가는 섬 주민을 만나 그림을 그리고 그 '살이'들을 글로 옮겼다. 그의 작업은 한 사람의 발자취를 담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같은 세대를 온몸으로 부대껴온 이들이 겪은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자 역사였다.'진천에서 왔어. 대율 너머. 열아홉에 앞집 할매가 중매했어. 우리 큰아버지가 목포에서 큰 가게 하는데 여기 와서 양파도 사가고 했제. 머스마가 선보러 아침 일찍 왔는데 나는 이웃 마을 이모네 밭매러 가서 하루 종일 기다렸지. 아들 서이 딸 하나. 첫눈에 반했제. 놈들은 밭에서 뙤약볕에 아그들 놓고 일하는데 일찌감치 목포로 내보냈더니 저그들만 놓고 갔다고 원망해, 내 속도 모르고. 엄마는 애기들만 놓고 갔다고. 엄마 사랑 못받았다고,'(주○○ 1954)화가는 자신이 그림을 가르치기보다 되레 '살이'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켜와 결로 상흔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마에 자리 잡은 골 깊은 주름으로, 또 다른 어떤 이는 장작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마디와 머리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릿발로 자신의 삶을 드러냈다. 어쩌면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음에도 자녀를 향한 교육열을 잃지 않았고, 엄마답고 아버지답게 '늙어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화가가 섬에서 하는 일은 자신의 작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겨울철 농한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주민과 함께 어우러져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해졌다. 미술 활동 프로그램은 주민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마을회관이나 둔장마을미술관에서 진행됐다. 연령대도 6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하다.처음에는 주민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화가는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그림을 잘 그리면 제가 할 일이 없다"며 주민을 이끌었다. 해가 바뀌면서 '학생(?)'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마을회관은 참가자들의 창작열로 금방 뜨거워졌다. "나 잘 그렸제?" "이 정도믄 화가의 작품 수준 아니여?" 자신감을 드러내는 주민들이 늘어가고,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짜장면으로 한턱을 내시겠다는 사람, 간식을 챙겨온 주민도 이어진다.화가는 주민들에게 지난 겨울 '내가 입어보고 싶었던 옷'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내가 입어보고 싶은 옷' '내가 좋아하는 옷'을 통해 자신을 꾸미는 작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성과는 온 마을 주민들의 관심 속에 둔장마을미술관에서의 '안혜경, 화가의 여행가방 전'으로 드러났다.◆마을회관, 50년만 미술관으로 재탄생둔장마을미술관은 신안의 섬과 섬을 이어주는 천사대교를 지나 자은도 북쪽 끝 지역 둔장해변 입구 섬마을에 자리하고 있다.미술관 계단 오르면 좌우로 둔장마을 사람들이 직접 그림을 그린 아트타일 2천500개로 이뤄진 '둔장마을 이야기'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2021년 12월 10×10㎝ 크기의 타일로 제작한 것이다. 꽃이나 글씨, 기호 등이 자유분방하고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나름대로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눈길을 끈다. 작품 수로 2천개가 훌쩍 넘다 보니 거충 훑어보아도 한참을 머물게 된다. 출입구 오른쪽에는 '둔장마을 탑'이 반긴다. 아트타일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이 탑은 둔장마을의 오랜 역사와 마을을 지키는 우두머리라는 상징적 의미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안혜경 작가가 만난 많은 사람들과 주민들이 직접 그린 그림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전시장 한 편에 소개된 둔장마을미술관의 '공간이야기'다.'둔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마을회관을 짓던 1971년도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인다. 새마을운동으로 받은 시멘트를 집집이 내서 고개 너머 고교마을에서 모래와 자갈을 섞어 블록을 만들었다. 마을회관을 짓고 손님을 초대하고 동네잔치를 열었다. 신안군 전체가 들썩였다. 다른 마을에서 견학을 왔고 고생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리민의 날'을 만들었다. 전국 최초로 스스로 만든 '리민의 날'이다. 올해 코로나19로 못했지만 50년간 이어진 진정한 마을축제다. 올해는 마을회관이 지어지고 딱 50년이 된 해다. 코로나19로 마을 축제가 열리진 못했지만 작은 미술관이 개관하며 기념할 만한 쉼표를 찍게 되었다.'지난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은미술관 공모사업에 선정된 신안군은 마을주민들의 뜻에 따라 노후된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둔장마을미술관'으로 오픈했다. 오랫동안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사용됐던 마을의 중심공간이었으나 건물이 노후돼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곳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신안군의 노력으로 50년 만에 미술관으로 재탄생, 마을 사람들의 사랑받는 중심공간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됐다.'유달초등학교 다니다 4학년에 자은 들어왔지. 애기 때부터 농사를 안 해봐서 힘들었지. 새마을운동 한창일 때 처음으로 경운기 사서 길 만들고 보리 콩 타작 다니고, 돈이 없으니 처남이 보증 서줘서. 21살에 결혼해서 지난 12월에 갔네. 참 영리한 사람이요. 두 살 차이. 묘소에 매일 갔어. 자꾸 잘못한 게 생각나서. 마당 한번 안 쓸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집사람이 다 했제.'(78세 강○○)전시된 사연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몰입되고 코끝이 찡해진다. 주름진 얼굴, 휑하니 넓어진 이마가 더욱 애처롭기도 하다.화가의 그림 앞에는 주민들이 그린 형형색색의 작품들이 놓여 있다. 초록색 상의에 밤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이 있고, 예쁜 분홍 치마를 입고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파란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사한 머리 장식을 한 여인, 분홍색 점무늬가 옹기종기 박혀있는 노란 원피스를 입은 사람도 있는데 모두 자신이 '입고 싶었던 옷'이다.섬의 매력에 끌린 화가는 자은도를 벗어나 흑산도와 장산도 주민도 함께 만나고 있다."섬에 사는 분들은 목포는 가봤지만 다른 섬에는 가본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배가 목포로 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섬도 그저 바라볼 뿐 갈 수는 없죠. 이것이 섬의 지리적 특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만나는 분들은 저보고 어디 가봤냐고 묻고 어떠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행가방에 각각 섬에서 그린 그림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보여드립니다."(안혜경 작가)'화가의 여행가방 전'은 그렇게 시작됐다.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 · 피아노 선율 넘실대는 천사의 섬
- · 희귀 식물에 조개·수석까지…천혜 자연 한자리에
- · 발길 닿는 곳마다 지붕 없는 박물관
- · 짱뚱어·칠게 시글시글··· 자연이 만든 '생태천국'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