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해변 1.5km에 펼쳐진 드넓은
백사장·청정바다 자랑거리 꼽혀
바람이 만든 모래산 또 다른 볼거리
커다란 소라·고둥 포토존도 마련
축구장 70배 규모 1004뮤지엄파크
수석정원 등 특색있는 테마 눈길 끌어
한 번도 못봤던 신비한 세계 눈앞에
[1004섬 신안-1섬1뮤지엄] ⑥ 자은도 <Ⅰ>
언제부터였을까. 가물가물했던 의식이 조금씩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코끝에서부터 익숙한 맛이 시나브로 체감되면서 잠에서 깼다는 것을 알았다. 섬 특유의 비릿하면서도 짭쪼름함은 마치 혀를 통해 뇌에 전달되는 것처럼 생생했다. 싫지는 않았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무시로 변하지 않고 늘 한결같은 데서 오는 안락함이 있다는 점이었다.
섬은 '자애롭고 은혜롭다'(慈恩)는 이름처럼, 자신을 찾는 모든 이에게 보금자리가 돼주었다.
섬은, 붙잡지 않았다. 누군가는 일자리를 찾아, 또 다른 누군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이삿짐을 쌌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섬은, 외면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그들 중 누구는 돌아왔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후였다. 섬은, 바다는 그런 곳이었다.
눈은 뜨지 않았지만 희부윰한 기운이 창을 통해 쏟아져 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의미지만 도무지 눈꺼풀이 열리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만 맞추고자 한다면 10~20분, 아니 넉넉잡아 30분쯤은 여유가 있을 것이었다. 누운 상태에서 가슴에 얹힌 오른손을 움직여 가볍게 바닥을 쓸어보았다. 불편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몸 상태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칼잠 자세로 몸을 접어보았다.
"끄~응. 아이고 삭신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지며 단말마 같은 신음소리가 흘렀다. 어깨와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고, 근육과 뼈마디가 군데군데 쑤시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몸뚱이 어느 한 곳 단단히 동티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시난고난하며 구들장만 지고 있을 수는 없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제 해안에서 무리하게 몸을 쓴 일들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잠을 청하기 전부터 몸이 찌뿌드드하고 묵지그리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오늘 바닷가가 또 어떻게 변했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북풍이라도 불라 치믄 또 난장판이 됐을지도 모르는디, 얼른 가봐야 쓰겄네."
그는 서둘러 차양 넓은 모자와 장갑을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시시각각 바닷물이 빠지는 모습이 눈에 선해지면서 발길도 급해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마을 인근에 위치한 양산해변이었다. 해변에 도착한 사람은 김 씨를 포함해 20여 명. 모두 바다환경을 지키자고 팔을 걷어붙인 사람들이었다. 해안가 쓰레기를 수거하고 해양 오염행위를 감시하는 이 사업에는 마을 주민과 여성단체 회원 등의 일반인과 공무원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양산해변은 고둥 따고 수영하던 놀이터"
"어렸을 때 집이 지금의 1004뮤지엄파크 자리에 있었거든요. 양산해변은 우리의 앞마당이자 놀이터였죠. 여름에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모래가 고와서 손으로 성도 쌓고 그랬어요. 그뿐인가요. 오빠들과 함께 고둥도 따고 굴도 까서 먹고 그랬거든요. 방풍나물이며, 해당화, 파리똥나무도 지천이었고요.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이사할 때까지 많은 추억을 쌓은 곳이랍니다."
신안군 자은면 신성마을 김경순(62) 씨는 양산해변과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 한 주인공이다. 드넓은 백사장과 청정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많은 쓰레기가 해류를 타고 밀려들어오면서 정화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 바닷가 청소를 위해 도착한 해변은 그야말로 쓰레기 천지였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토해놓은 해초류 모자반이 해안을 따라 길게 줄지어 있고, 고운 모래밭에는 각종 폐그물과 스티로폼, 플라스틱 등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오메 오메 요것이 뭔 일이다냐."
현장을 본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고리눈이 되고 말았다. 한눈에 봐도 그 양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김 씨는 가슴부터 쓸어내렸다. 그렁그렁 눈물까지 번질 지경이었다. 유년기를 자신과 함께 보낸 해변이 쓰레기로 덮인 모습을 지켜보니 마치 자신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까지 훼손되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렸다.
양산해변은 그동안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틈틈이 손을 모아 정화활동을 벌이곤 했었다. 하지만 모두 생업에 쫓기고, 주민들이 고령에 접어들면서 얼마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많은 쓰레기들이 방치된 모양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 정화활동에 나섰다. 모래 바닥에 깊이 박힌 그물들을 자르고, 수로에 다복다복 숨겨진 페트병, 스티로폼 등을 일일이 찾아 주워모았다. 정화 활동 중 화를 부채질한 것은 쓰레기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는 데 있었다. 어구로 활용되는 스티로폼은 물론이고 수통이나 플라스틱 제품 중 상당수는 형태만 보고서도 단박에 중국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 버린 쓰레기를 우리 손으로 치우는 현실을 생각하면 저절로 분통이 터졌다.
쓰레기를 치우는 데는 중장비도 동원됐다. 모래 깊숙이 박힌 그물을 빼내거나 사람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부피의 목재 등은 굴착기가 맡았다.
쓰레기를 가득 실은 트럭이 몇 번을 오갔는지 모른다.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노동에 지쳐 아침에 눈을 뜨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중동무이할 수는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사흘, 열흘이 지나면서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해변을 보는 것만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김씨는 "지금도 오랫동안 많은 바람이 불면 한꺼번에 많은 쓰레기가 밀려오지만 그때 그때 청소를 하기 때문에 깨끗한 바다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지역 주민과 공무원이 '우리 섬을 아름답게 가꿔 누구나 오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아 이뤄진 성과"라고 강조했다.
해양문화복합단지 '1004뮤지엄파크'
민·관이 힘을 모아 정화활동을 벌인 덕택에 현재의 양산해변은 1.5㎞에 달하는 드넓은 백사장과 청정바다를 자랑한다. 1004뮤지엄파크에 펼쳐진 바다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해변에 위치한 사구(沙丘)는 바람이 만든 '모래산'으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커다란 소라와 고둥은 포토존으로 안성맞춤이다.
또 구름 사이로 서서히 지는 태양과 그 모습을 흡수한 바닷물이 조화를 이룬 일몰 풍경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양산해변을 끼고 있는 1004뮤지엄파크는 지난 2020년 8월 개관한 해양문화복합단지다. 50만㎡(축구장 70배) 규모의 넓은 부지에 특색있는 테마로 이뤄진 뮤지엄과 공원으로 구성됐다. 이곳에는 세계조개박물관, 신안자생식물 뮤지엄, 새우란 전시관, 1004섬 수석미술관, 수석정원, 뮤지엄 비치캠프 등이 갖춰져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1004뮤지엄파크 입구에 다다르면 커다란 표지문이 먼저 반긴다. 양산해변을 비롯 수석미술관&수석정원, 조개박물관 등 주요 시설들을 알려준다. 좌우로 가지런히 정리된 호랑가시나무를 따라 기분 좋게 진입하면 원하는 목적지에 금방 다다를 수 있다.
세계조개박물관은 건물 외관부터 색다르다. 975㎡(135평)에 달하는 건축물은 백합조개를 닮은 형상을 하고 있다. 건물은 한 컷의 사진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좌우로 길게 엎드려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바다 생명체를 탐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 세계 1만1천여 점의 신비한 조개고둥 표본과 조개 공예작품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시관은 2개의 주제관으로 구성됐다. 1관은 멸종위기종인 나팔고둥, 세계에서 제일 큰 오스트리안트럼펫고둥, 기원전부터 화폐로 쓰였던 개오지고둥 등 지금껏 보지 못한 신비하고 화려한 조개와 고둥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2관은 '인류와 조개고둥'을 주제로 선사시대 패총에서부터 현대의 조개공예까지 인류와의 인연을 흥미롭게 연출하고 있다. 곳곳에 숨어있는 포토존은 방문객들에게 추억을 선사해준다.
이곳에 전시된 조개, 고둥류는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임양수 관장이 과거 원양어선을 타고 40여 년간 해양을 누비며 수집한 것들이다. 임 관장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신안군의 갯벌생태계 보호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 감명받아 자신이 소유한 전시물 중 조개·고둥 표본 대다수를 신안군에 기증했다.
박물관을 돌아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지만, 관람이 끝날 무렵에는 해양환경 보호의 중요성과 신비한 바다 생태계를 저절로 이해할 수 있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 깊은 주름, 굳은살에 배긴 삶··· 예술이 되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각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살이'를 듣고 함께 소통하며 이를 그림으로 담는 작업을 하던 것이 계기였다. 신안 자은도 둔장마을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제주도 같은 '섬 아닌 섬'을 제외하고는 처음 찾은 섬이었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으로 무장한 주변인들의 걱정은 더욱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신안의 섬이 무려 1천 개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섬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큰 장벽은 주민과의 소통이었다. 주어진 생업에 묵묵히 땀흘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은 접촉과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화가-주민 어우러진 그림그리기 프로그램어쩌면 필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가는 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행 가방을 풀었다. 화가가 필연을 생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섬 주민이 어설픈 이방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면서부터였다. 화가와 섬 주민은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만나게 돼 있었던 사이처럼 금방 친해졌다. '섬'과 '섬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화가가 이태에 걸쳐 섬을 찾고, 그 이듬해에도 섬을 찾으면서 더욱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화가는 어느 사이 섬 주민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화가는 섬을 찾기 위해 여행가방을 싸는 시간이 행복해졌다.화가는 섬 주민을 만나 그림을 그리고 그 '살이'들을 글로 옮겼다. 그의 작업은 한 사람의 발자취를 담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같은 세대를 온몸으로 부대껴온 이들이 겪은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자 역사였다.'진천에서 왔어. 대율 너머. 열아홉에 앞집 할매가 중매했어. 우리 큰아버지가 목포에서 큰 가게 하는데 여기 와서 양파도 사가고 했제. 머스마가 선보러 아침 일찍 왔는데 나는 이웃 마을 이모네 밭매러 가서 하루 종일 기다렸지. 아들 서이 딸 하나. 첫눈에 반했제. 놈들은 밭에서 뙤약볕에 아그들 놓고 일하는데 일찌감치 목포로 내보냈더니 저그들만 놓고 갔다고 원망해, 내 속도 모르고. 엄마는 애기들만 놓고 갔다고. 엄마 사랑 못받았다고,'(주○○ 1954)화가는 자신이 그림을 가르치기보다 되레 '살이'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켜와 결로 상흔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마에 자리 잡은 골 깊은 주름으로, 또 다른 어떤 이는 장작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마디와 머리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릿발로 자신의 삶을 드러냈다. 어쩌면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음에도 자녀를 향한 교육열을 잃지 않았고, 엄마답고 아버지답게 '늙어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화가가 섬에서 하는 일은 자신의 작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겨울철 농한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주민과 함께 어우러져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해졌다. 미술 활동 프로그램은 주민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마을회관이나 둔장마을미술관에서 진행됐다. 연령대도 6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하다.처음에는 주민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화가는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그림을 잘 그리면 제가 할 일이 없다"며 주민을 이끌었다. 해가 바뀌면서 '학생(?)'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마을회관은 참가자들의 창작열로 금방 뜨거워졌다. "나 잘 그렸제?" "이 정도믄 화가의 작품 수준 아니여?" 자신감을 드러내는 주민들이 늘어가고,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짜장면으로 한턱을 내시겠다는 사람, 간식을 챙겨온 주민도 이어진다.화가는 주민들에게 지난 겨울 '내가 입어보고 싶었던 옷'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내가 입어보고 싶은 옷' '내가 좋아하는 옷'을 통해 자신을 꾸미는 작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성과는 온 마을 주민들의 관심 속에 둔장마을미술관에서의 '안혜경, 화가의 여행가방 전'으로 드러났다.◆마을회관, 50년만 미술관으로 재탄생둔장마을미술관은 신안의 섬과 섬을 이어주는 천사대교를 지나 자은도 북쪽 끝 지역 둔장해변 입구 섬마을에 자리하고 있다.미술관 계단 오르면 좌우로 둔장마을 사람들이 직접 그림을 그린 아트타일 2천500개로 이뤄진 '둔장마을 이야기'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2021년 12월 10×10㎝ 크기의 타일로 제작한 것이다. 꽃이나 글씨, 기호 등이 자유분방하고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나름대로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눈길을 끈다. 작품 수로 2천개가 훌쩍 넘다 보니 거충 훑어보아도 한참을 머물게 된다. 출입구 오른쪽에는 '둔장마을 탑'이 반긴다. 아트타일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이 탑은 둔장마을의 오랜 역사와 마을을 지키는 우두머리라는 상징적 의미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안혜경 작가가 만난 많은 사람들과 주민들이 직접 그린 그림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전시장 한 편에 소개된 둔장마을미술관의 '공간이야기'다.'둔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마을회관을 짓던 1971년도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인다. 새마을운동으로 받은 시멘트를 집집이 내서 고개 너머 고교마을에서 모래와 자갈을 섞어 블록을 만들었다. 마을회관을 짓고 손님을 초대하고 동네잔치를 열었다. 신안군 전체가 들썩였다. 다른 마을에서 견학을 왔고 고생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리민의 날'을 만들었다. 전국 최초로 스스로 만든 '리민의 날'이다. 올해 코로나19로 못했지만 50년간 이어진 진정한 마을축제다. 올해는 마을회관이 지어지고 딱 50년이 된 해다. 코로나19로 마을 축제가 열리진 못했지만 작은 미술관이 개관하며 기념할 만한 쉼표를 찍게 되었다.'지난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은미술관 공모사업에 선정된 신안군은 마을주민들의 뜻에 따라 노후된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둔장마을미술관'으로 오픈했다. 오랫동안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사용됐던 마을의 중심공간이었으나 건물이 노후돼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곳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신안군의 노력으로 50년 만에 미술관으로 재탄생, 마을 사람들의 사랑받는 중심공간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됐다.'유달초등학교 다니다 4학년에 자은 들어왔지. 애기 때부터 농사를 안 해봐서 힘들었지. 새마을운동 한창일 때 처음으로 경운기 사서 길 만들고 보리 콩 타작 다니고, 돈이 없으니 처남이 보증 서줘서. 21살에 결혼해서 지난 12월에 갔네. 참 영리한 사람이요. 두 살 차이. 묘소에 매일 갔어. 자꾸 잘못한 게 생각나서. 마당 한번 안 쓸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집사람이 다 했제.'(78세 강○○)전시된 사연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몰입되고 코끝이 찡해진다. 주름진 얼굴, 휑하니 넓어진 이마가 더욱 애처롭기도 하다.화가의 그림 앞에는 주민들이 그린 형형색색의 작품들이 놓여 있다. 초록색 상의에 밤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이 있고, 예쁜 분홍 치마를 입고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파란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사한 머리 장식을 한 여인, 분홍색 점무늬가 옹기종기 박혀있는 노란 원피스를 입은 사람도 있는데 모두 자신이 '입고 싶었던 옷'이다.섬의 매력에 끌린 화가는 자은도를 벗어나 흑산도와 장산도 주민도 함께 만나고 있다."섬에 사는 분들은 목포는 가봤지만 다른 섬에는 가본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배가 목포로 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섬도 그저 바라볼 뿐 갈 수는 없죠. 이것이 섬의 지리적 특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만나는 분들은 저보고 어디 가봤냐고 묻고 어떠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행가방에 각각 섬에서 그린 그림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보여드립니다."(안혜경 작가)'화가의 여행가방 전'은 그렇게 시작됐다.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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