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주름, 굳은살에 배긴 삶··· 예술이 되다

입력 2024.03.20. 10:26 김만선 기자
[1004섬 신안-1섬1뮤지엄] ⑥자은도<Ⅲ>
북쪽 끝 섬마을 둔장미술관 눈길
마을회관 리모델링 해 미술관으로
안혜경 작가·주민들 '운명적 만남'
저마다의 사연 그림으로 꽃 피워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각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살이'를 듣고 함께 소통하며 이를 그림으로 담는 작업을 하던 것이 계기였다. 신안 자은도 둔장마을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도 같은 '섬 아닌 섬'을 제외하고는 처음 찾은 섬이었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으로 무장한 주변인들의 걱정은 더욱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신안의 섬이 무려 1천 개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섬에 도착했을 때 가장 큰 장벽은 주민과의 소통이었다. 주어진 생업에 묵묵히 땀흘리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은 접촉과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화가-주민 어우러진 그림그리기 프로그램

어쩌면 필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가는 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행 가방을 풀었다. 화가가 필연을 생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섬 주민이 어설픈 이방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면서부터였다. 화가와 섬 주민은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만나게 돼 있었던 사이처럼 금방 친해졌다. '섬'과 '섬사람'에 대한 선입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화가가 이태에 걸쳐 섬을 찾고, 그 이듬해에도 섬을 찾으면서 더욱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화가는 어느 사이 섬 주민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화가는 섬을 찾기 위해 여행가방을 싸는 시간이 행복해졌다.

화가는 섬 주민을 만나 그림을 그리고 그 '살이'들을 글로 옮겼다. 그의 작업은 한 사람의 발자취를 담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같은 세대를 온몸으로 부대껴온 이들이 겪은 생생한 현장의 기록이자 역사였다.

'진천에서 왔어. 대율 너머. 열아홉에 앞집 할매가 중매했어. 우리 큰아버지가 목포에서 큰 가게 하는데 여기 와서 양파도 사가고 했제. 머스마가 선보러 아침 일찍 왔는데 나는 이웃 마을 이모네 밭매러 가서 하루 종일 기다렸지. 아들 서이 딸 하나. 첫눈에 반했제. 놈들은 밭에서 뙤약볕에 아그들 놓고 일하는데 일찌감치 목포로 내보냈더니 저그들만 놓고 갔다고 원망해, 내 속도 모르고. 엄마는 애기들만 놓고 갔다고. 엄마 사랑 못받았다고,'(주○○ 1954)

화가는 자신이 그림을 가르치기보다 되레 '살이'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켜와 결로 상흔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마에 자리 잡은 골 깊은 주름으로, 또 다른 어떤 이는 장작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마디와 머리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릿발로 자신의 삶을 드러냈다. 어쩌면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음에도 자녀를 향한 교육열을 잃지 않았고, 엄마답고 아버지답게 '늙어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화가가 섬에서 하는 일은 자신의 작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겨울철 농한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주민과 함께 어우러져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해졌다. 미술 활동 프로그램은 주민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마을회관이나 둔장마을미술관에서 진행됐다. 연령대도 6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하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화가는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그림을 잘 그리면 제가 할 일이 없다"며 주민을 이끌었다. 해가 바뀌면서 '학생(?)'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마을회관은 참가자들의 창작열로 금방 뜨거워졌다. "나 잘 그렸제?" "이 정도믄 화가의 작품 수준 아니여?" 자신감을 드러내는 주민들이 늘어가고,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짜장면으로 한턱을 내시겠다는 사람, 간식을 챙겨온 주민도 이어진다.

화가는 주민들에게 지난 겨울 '내가 입어보고 싶었던 옷'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내가 입어보고 싶은 옷' '내가 좋아하는 옷'을 통해 자신을 꾸미는 작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성과는 온 마을 주민들의 관심 속에 둔장마을미술관에서의 '안혜경, 화가의 여행가방 전'으로 드러났다.

◆마을회관, 50년만 미술관으로 재탄생

둔장마을미술관은 신안의 섬과 섬을 이어주는 천사대교를 지나 자은도 북쪽 끝 지역 둔장해변 입구 섬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계단 오르면 좌우로 둔장마을 사람들이 직접 그림을 그린 아트타일 2천500개로 이뤄진 '둔장마을 이야기'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2021년 12월 10×10㎝ 크기의 타일로 제작한 것이다. 꽃이나 글씨, 기호 등이 자유분방하고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나름대로의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 눈길을 끈다. 작품 수로 2천개가 훌쩍 넘다 보니 거충 훑어보아도 한참을 머물게 된다. 출입구 오른쪽에는 '둔장마을 탑'이 반긴다. 아트타일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이 탑은 둔장마을의 오랜 역사와 마을을 지키는 우두머리라는 상징적 의미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안혜경 작가가 만난 많은 사람들과 주민들이 직접 그린 그림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전시장 한 편에 소개된 둔장마을미술관의 '공간이야기'다.

'둔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마을회관을 짓던 1971년도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인다. 새마을운동으로 받은 시멘트를 집집이 내서 고개 너머 고교마을에서 모래와 자갈을 섞어 블록을 만들었다. 마을회관을 짓고 손님을 초대하고 동네잔치를 열었다. 신안군 전체가 들썩였다. 다른 마을에서 견학을 왔고 고생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리민의 날'을 만들었다. 전국 최초로 스스로 만든 '리민의 날'이다. 올해 코로나19로 못했지만 50년간 이어진 진정한 마을축제다. 올해는 마을회관이 지어지고 딱 50년이 된 해다. 코로나19로 마을 축제가 열리진 못했지만 작은 미술관이 개관하며 기념할 만한 쉼표를 찍게 되었다.'

지난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은미술관 공모사업에 선정된 신안군은 마을주민들의 뜻에 따라 노후된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둔장마을미술관'으로 오픈했다. 오랫동안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사용됐던 마을의 중심공간이었으나 건물이 노후돼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곳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신안군의 노력으로 50년 만에 미술관으로 재탄생, 마을 사람들의 사랑받는 중심공간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됐다.

'유달초등학교 다니다 4학년에 자은 들어왔지. 애기 때부터 농사를 안 해봐서 힘들었지. 새마을운동 한창일 때 처음으로 경운기 사서 길 만들고 보리 콩 타작 다니고, 돈이 없으니 처남이 보증 서줘서. 21살에 결혼해서 지난 12월에 갔네. 참 영리한 사람이요. 두 살 차이. 묘소에 매일 갔어. 자꾸 잘못한 게 생각나서. 마당 한번 안 쓸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집사람이 다 했제.'(78세 강○○)

전시된 사연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몰입되고 코끝이 찡해진다. 주름진 얼굴, 휑하니 넓어진 이마가 더욱 애처롭기도 하다.

화가의 그림 앞에는 주민들이 그린 형형색색의 작품들이 놓여 있다. 초록색 상의에 밤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이 있고, 예쁜 분홍 치마를 입고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다. 파란 원피스를 차려입고 화사한 머리 장식을 한 여인, 분홍색 점무늬가 옹기종기 박혀있는 노란 원피스를 입은 사람도 있는데 모두 자신이 '입고 싶었던 옷'이다.

섬의 매력에 끌린 화가는 자은도를 벗어나 흑산도와 장산도 주민도 함께 만나고 있다.

"섬에 사는 분들은 목포는 가봤지만 다른 섬에는 가본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배가 목포로 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섬도 그저 바라볼 뿐 갈 수는 없죠. 이것이 섬의 지리적 특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만나는 분들은 저보고 어디 가봤냐고 묻고 어떠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행가방에 각각 섬에서 그린 그림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보여드립니다."(안혜경 작가)

'화가의 여행가방 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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