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12. 마한 정체성과 장보고(下)

입력 2019.12.23. 19:53 김승용 기자
영암 선암마을 전승 출생설화에 역사적 사실 암시
상대포 역사공원(영암)

우리 지역 숙원인 마한 특별법이 ‘마한·가야·탐라 특별법’으로 제정될 것 같다. 이를 담을 구체적인 논의와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마한의 백제’라는 지극히 당연한 인식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한사에 우리가 주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장보고와 영암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로 도선의 스승 혜철과 장보고의 관계이다. 혜철이 중국에 유학 다녀오고, 동리산문을 개창할 때 장보고의 도움이 있었다. 구림 출신 도선이 혜철 문하로 출가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도선이 태어난 828년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도선은 영암 출신 장보고와 어떤 형태로든지 인연이 닿아 있었다.

장보고 구비전설은 과거의 전통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형성 및 변형되고 있는 현재성이다. 반역도당이라 하여 역사적 낙인으로 거세되거나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보고 구비전설은 학계의 재평가 작업 및 대중문화계의 콘텐츠화에 힘입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최근 신라 민중의 수호자,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양 경영자로서의 장보고의 위상이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삼국사기 등 국내 문헌에서는 주로 역신(逆臣), 체제의 반역자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있다. 중국이나 일본 문헌에서는 장보고를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 민족적 영웅, 민중의 수호자와 같은 긍정적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장보고를 둘러싼 문헌 기록 담당층 간에 존재하는 이해관계의 층위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국내 문헌 기록의 기술 태도에는 과거 역사의 기득권층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체제 하부의 민중들에 의해 창조된 구비전설은 문헌 기록과 역사적 사실을 일정 부분 공유하면서도 각기 다른 인식체제에 기반하고 있다. 이른바 지식인의 의식적 소산인 문헌 기록이나 기득권층의 자기 합리화를 담고 있는 역사기록과는 달리 구비전설은 민중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만의 인식체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덕진 선암마을에만 유독 전승되고 있는 장보고 출생과 관련된 설화에는 역사적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영암과 비교적 멀지 않은 화순 운주사에 장보고와 관련된 다음의 전승이 있다. 즉, 장보고를 제거한 신라 중앙정부는 그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하여 청해진 사람들을 김제 벽골제의 제방축조 공역에 강제 동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역이 끝난 후 귀향하던 청해진 사람들이 운주사에 잠시 머무르다 장보고를 생각하며 ‘천불천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운주사는 그곳에서 ‘運住’라는 와편이 나와 ‘運住寺’로 불리고 있지만 ‘運舟寺’라는 이름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배와 관련된 전승이 많다.

특히 석탑들의 배치모양은 돛대가 있는 배의 모양이고, 와불은 마치 선박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며, 돛대 위의 칠성석은 나침반 구실을 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해상왕 장보고를 연상하며 이러한 불상들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 조성배경이 장보고와 연결되는 것은 운주사의 단월(檀越)이 장보고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운주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실제 도선이 이 사찰을 창건한 것인지, 아니면 도선이 운주사에 주석하면서 비보개념을 넣은 것이 창건 사실로 부회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도선이 운주사와 깊은 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장보고가 후원한 운주사에 같은 영암 출신 도선이 주석하고 있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선암마을 출신 장보고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고향 근처의 국제무역항 상대포·남해포 등을 오가는 중국·일본·동남아, 심지어 서역상인 및 학승들을 통해 국제적 견문이 형성되었다. 그가 중국에 일찍 건너간 것은 마한 이래로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방적인 지역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까지 그의 중국 진출을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 사회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필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통일신라의 서남부에 위치한 옛 마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던 영산 지중해 주민들에게는 경주 중심의 골품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마한 이래로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해 활동 무대를 확장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누구보다 마한인의 정체성을 간직하였던 장보고는 대외교역을 통해 삶을 이루었던 이 지역 출신들이 중국 해적선의 약탈 대상이 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서남해의 안정적인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적의 소탕이 중요함을 깨닫고 귀국하여 “중국 도처에는 신라인들이 잡혀 와 노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청해에 진을 설치한다면 해적들이 사람을 잡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하며 진의 설치를 건의하니 흥덕왕이 사졸 1만 명을 주었다 한다. 이때 사졸은 중앙군이라기보다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 일대의 장정들이라고 살피는 것이 좋겠다.

장보고가 흥덕왕으로부터 청해진 대사의 직명을 받은 것이 828년의 일이다. 그보다 앞서 824년 무렵 장보고는 이미 교역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진의 설치를 요청하고 승인을 받은 것은 중앙정부가 서남해 지역에서의 장보고의 독자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청해진이 설치된 태화 연간(827-835)에는 두목의 기록에서 살필 수 있듯이 신라 사람을 잡아다가 파는 사례는 찾아지지 않는다. 장보고는 당과 교역하기 위하여 수시로 ‘대당매물사’라는 교역사절단도 파견하였다. 중국에서 그의 교역활동의 거점은 주로 등주 적산지역이었다. 중국 현지 사정에 밝은 데다 마한지역 출신끼리 맺어진 깊은 유대감, 중앙정부로부터 공인된 지위 등은 그 지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무왕의 즉위에 결정적 공헌을 한 장보고는 그 공으로 그의 딸을 왕비로 만들려 하였으나 ‘海島인 딸’이라는 중앙귀족들 반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주 귀족세력들이 서남단의 해상세력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더 분명한 것은 마한계가 신라를 접수할 수 있다는 우려감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에 신라 정부는 장보고 세력의 팽창을 방관할 수 없었다. 무주 곧 광주사람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데는 장보고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장보고가 반란을 꾀하였다는 이제까지의 검토는 재고하여야 한다. 즉,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단정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그가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었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여 반란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장보고가 반란을 꾀했다는 것은 후대의 부회이거나 당시 신라 정부가 장보고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삼기 위해 나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동사강목’을 저술한 조선 후기 유명한 역사학자 순암 안정복이 평가한 바와 같이 신라 조정의 음모로 盜殺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왜 염장은 장보고를 암살하였을까? 이는 서남권을 장악한 장보고가 운주사·동리산의 개조 혜철의 단월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내륙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것에 대한 염장 등 내륙 출신의 불만을 신라 중앙정부가 교묘히 이용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마한 출신끼리 가졌던 유대감이 점차 이완되며 나타난 내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이 지역의 역사를 변방으로 밀려나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얼마 후 견훤이 세력을 키워갈 때 나타났던 동북내륙 세력과 서남해안지방 세력의 갈등과도 흡사한 것이었다.

문학박사·초당대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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