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마한사회 성격 알 수 있는 사료들, 교과서에 기재돼야

입력 2020.08.06. 18:15 이석희 기자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
<2>한국 고대사의 뿌리 마한,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있다(下)

내동리 쌍무덤 출토 구슬

작년 10월 말 국립나주박물관에서 열린 '제5회 전국 마한문화역사탐구 대회'의 고등부 심사를 맡은 기억이 있다. 그때 대회에 나온 학생들의 마한의 역사 인식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복속하였다는 인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국립나주박물관에서 마한특별전을 열었는데, 거기에 보면 마한을 연구하는 단체나 기관이 무려 20곳이 훌쩍 넘는다. 어쨌든 20여 년 넘게 마한을 이들 연구 기관들이 백제중심이 아닌 마한중심으로 연구를 하였지만, 학생들의 역사인식의 변화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역사교과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역사 수업은 주로 교과서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몇 년 전 박근혜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하려 할 때 역사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이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 교육의 현실이 자세히 분석되어져야 한다. 필자가 마한 관련 교과서 서술이 어떤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마한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고대사에 대한 인식 나아가 역사를 보는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 직전 교육과정인 2009 개정 교육과정 때의 한국사 교과서에는 마한에 관한 서술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삼한,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다'라는 소제목을 정한 후 삼한이 한강이남 지역의 국가 토대였음을 설명하였다.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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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변한과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삼한 가운데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다.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 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하였다."

삼한 가운데서 마한의 세력이 컸다고 하는 사실과 영산강 유역의 나주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의 하나임을 밝혔다. 마한 왕이 삼한을 영도하였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그 이전의 교과서에서도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호에 언급한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소제목부터 달라져 있다. '옥저와 동예, 삼한의 성립'이라는 소제목으로 삼한을 옥저, 동예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다. 옥저와 동예는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렇게 작은 연맹체인 옥저와 동예를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삼한과 동격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2009 교육과정에서는 '옥저와 동예,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다.', '삼한, 백제·신라·가야의 토대가 되다'와 같이 옥저·동예와 삼한을 분리하여 서술하였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심한의 서술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옥저와 동예, 삼한의 성립'의 소제목에 딸린 서술 내용도 "한반도 남부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성립하였다. 삼한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여러 소국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연맹왕국이다. 각 왕국은 신지·읍차라 부르는 군장이 통치하였고,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에서 종교 의례를 주관하였다. 이처럼 삼한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다. 철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 사회에서는 변화가 나타났다. 마한 지역은 백제에 통합되었고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 연맹이 성장하였다"고 하여 소도와 같은 삼한 사회의 종교적 특징을 주로 언급하는 데 그쳤다. 더구나 진한, 변한은 신라와 가야로 발전하였다고 서술한 반면, 마한은 백제에 통합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009 개정 교육과정과 비교하여 볼 때 2015 개정 교육과정은 전체적으로 삼한의 비중이 축소된 데다 내용 면에서도 마한의 서술내용이 상대적으로 빈약함을 알 수 있겠다.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였다는 설명도 누락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삼한의 비중이, 그것도 마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대사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고대사의 서술 비중이 낮아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태리의 유명한 역사가 크로체(B.Croce)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하여 현대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의 삶과 가까운 직전의 역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역사의 근원인 고대사를 비롯하여 고려, 조선 시대 등 각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역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역사란 긴 연속선상에서 살필 때 비로소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대사의 비중이 줄어졌다고 하여 한국고대사의 한 축인 마한사 서술을 옥저, 동예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삼한사의 비중을 줄이려고 하는 또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곧 마한사 서술 비중이 낮아지는 것은 최근에 출토된 영산강 유역의 여러 유물을 통해 마한이 4세기 후반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이병도의 학설이 비판받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2015 교육과정에 마한이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여전히 서술되어 있다. 필자가 4세기 중엽 백제의 마한 병합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누차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설이 여전히 고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4세기 중엽 백제의 마한 병합설을 주장하는 일부 세력이 마한사의 서술 비중을 더욱 낮추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필자의 이러한 생각이 억측이길 바란다.

한편 마한 사회의 특성을 살필 수 있는 중국 기록은 많다. 이를테면, "마한인은 비록 싸우고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 먼저 굴복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라는 진서 기록이 있다. 마한 사회가 독립적인 연맹체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적 동질성을 지니고 상호 경쟁과 협조를 하였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료이다. 5·18민주화운동에서 발현되는 '나눔·배려·공동체 정신'이 이미 이때에 나타나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마한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라는 역시 진서 기록도 마한인의 강건한 기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임진의병과 한말의병전쟁, 항일독립운동 등 외세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이 지역의 항쟁정신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마한 사회의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사료를 교과서에서 소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소도(蘇塗)' 관련 내용만 반복되어 소개되고 있다. 균형 잡힌 역사 인식을 지닌 교과서 집필진의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박해현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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