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초연됐던 스트라빈스키의 총체예술극 '병사이야기'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호평 속에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곧이어 예정되었던 지방순회공연 전체가 당시 스위스와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유행성 독감으로 취소되고 마는 불운을 겪었다. 우연하게도 곳곳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공연취소가 잇따른 이 시기에,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기회가 귀한 이 작품을 지난 10월 31일 저녁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 작품 '병사이야기'는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를 대표하는 주요 악기들에 대한 음악적 요구가 큰 까닭에 연주자들이 도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곡이다. 게다가 시인 라뮈(C.F. Ramuz, 1878~1947)의 프랑스어로 된 원작대본이 지나치게 시(詩)적이어서 그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한 번안과 각색이 몹시 어렵기 때문에, 가끔 연주회에서 그 음악만 연주되는 경우는 있지만, 좀처럼 작품 전체를 무대에서 직접 감상할 기회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 놀랍게도 광주에서 젊은 지휘자 박승유가 연출자 김민주와 공동작업으로 이 작품을 직접 한글대본으로 번역했고 음악공연단체인 K아트의 공연으로 광주 초연을 한 것이다.
세상의 여러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전체 2부로 이루어져 있는 '병사이야기'는 독특한 형식과 편성의 음악극이다. 7명의 연주자들과 함께 나레이터·연극배우·발레리나가 등장하여 왈츠·탱고·래그타임 등 작곡 당시 서구 유행춤곡들을 콜라보와 아이러니로 변형시킨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재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곡으로 독주악기들을 차례로 나열시키는 특이한 관현악 편성이 특징인데, 이날 공연에서 예술감독 박승유와 K아트는 자신들의 음악적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재즈리듬, 행진곡, 춤곡, 서커스 분위기의 연주들이 연기자와 무용가들의 공연과 무척 잘 어우러져서, 무대 위 공연자들과 객석의 청중들을 하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작품인데도 이날 공연장 띄어 앉기로 제외된 좌석 외에는 만석이었는데, 이는 새로운 공연에 대한 청중들의 갈증과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K아트는 이번 공연을 통해 일반 관객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근현대 작품들을 알리고 또 모두 함께 공연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자신들의 포부에 어느 정도 다가갔다고 여겨진다. 이 작품 '병사이야기'에서 악마에게 팔아버린 병사의 바이올린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그 어떤 것, 즉 예술을 뜻한다. 그래서 이 공연을 보고 들으며 청중들은 다시 한 번, 인간에게 예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좋은 공연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곳곳에서 재공연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공연예술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보다 많이 뒷받침돼 이처럼 참신한 시도와 예술적 공연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스트라빈스키가 이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어려운 시기에 피폐해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큰 호응을 얻었던 것처럼, K아트가 초연한 광주의 '병사이야기'도 지금 코로나19로 힘든 우리 국민들에게 심오하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범영숙 피아니스트
- 일상 속 휴식 가능한 건축적 산책 공간 최근 광주광역시건축사회 회원 20여명은 대구 군위에 자리한 사유원 답사를 다녀왔다. 광주광역시 건축사회(회장 정인채) 회원 20여명이 함께 최근 사유원 답사에 다녀왔다.사유원은 대구 군위군에 위치한 곳이다. 광주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꽤 먼 거리라 생각하고 나선 길이 무색하게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심리적 거리는 1시간정도 되는 듯 했다.사유원은 대구의 향토기업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모과나무를 수집해 키우던 정원을 '사유를 위한 수목원'으로 조성하고자 승효상 건축가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구상하고 준비해, 2021년 9월 정식으로 개관했다.우리는 코르텐강판소재의 정문 '치허문'을 지나, 안내소에 도착했다. 생수 한 병과 답사지의 지도가 담긴 간단한 책자를 들고 '사유원'을 두발로 사유할 준비를 했다. 근래에 계속 된 비도 잠시 쉬는 답사 날, 봄의 기운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사유원은 철과 콘크리트로 된 계단으로 시작한다. 걷는 내내 소나무향과 흙 밟는 소리, 회원들이 가볍게 나누는 잔잔한 대화소리가 함께 했다. 간간히 답사임을 망각하고 '좋은 산책'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산책로를 따라 10여분 걷다 보면 첫 번째 목적지인 '소요헌'이 눈에 들어온다. 소요헌은 '자유롭게 거니는 집' 이라는 주제로 설계 된,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자연과 건축이라는 극명한 차이를 조화롭게 엮어 낸 건물이다. 노출콘크리트로 된 소요헌은 인공조명 없이 자연채광만으로 공간의 깊이와 빛의 질감을 아름답게 드러낸다. 빛을 따라 걷다보면 우직한 철문이 나타난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전면이 유리로 된 창과 건축 모형, 쉴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이 곳은 건축가의 방(요요빈빈) 이라고 한다. 알바로 시자가 디자인한 가구와 드로잉을 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알바로 시자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것'들에 영감을 얻고 발길을 옮겨, 사유원의 시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모과나무 정원 '풍설기천년'으로 향했다. 유재성 회장은 우연히 일본으로 밀반출될 예정이었던 모과나무 네 그루를 알게 되었고, 이 공간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모과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 된 귀한 나무들이었는데, 일본 분재로 모과나무가 인기가 많아 일제 강점기시절 부터 우리나라의 모과나무가 밀반출되었다고 한다. 이를 알고 유재성 회장은 모과나무들을 사 모으기 시작하였고, 무려 108그루를 한곳에 모아 가꾸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유원의 시작이다.300년 된 모과나무지만 아직도 연분홍색의 단정한 꽃이 피고, 향기로운 모과가 열린다고 한다. 자연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다.회원들과 얘기하며 걷다보면 어느덧 사유원 정상에 도착한다. 저 멀리 대구 팔공산이 보이는 이곳에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명정이 위치해 있다. 콘크리트로 된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지하로 내려가 하늘만 보이는 건축물과 만난다. 정상에 올라 좋은 풍경을 보았으니, 이곳에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명상하는 고요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 또한 이곳에서 한참을 물과 빛이 만들어준 그림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허만수 건축사명정 옆으로는 최욱 건축가가 설계한 카페 '가가빈빈'이 자리한다. 사유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지막한 단층의 '가가빈빈'은 사유원을 한없이 관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곳에서 향긋한 차와 함께하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광주에도 사유원처럼 건축적 산책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과 질투가 마음한 곳에 생겨난다. 물론 광주에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의 거리, 광주공원, 양림동 등 역사성과 랜드마크적인 요소가 있는 좋은 건축물과 장소가 있다.광주천이나 영산강은 산책할 수 있는 보행자 동선과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추어져 있다. 이를 활용해서 사유원처럼 숲을 거닐며 건축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이 강가를 거닐며 현대 건축을 만나는 경험 또한 광주시민에게 일상 속 휴식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허만수 사계절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 대표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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