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작가·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지금 파란 색 바탕에 소주병 그림이 내 앞에 있다. 소주병에는 여러 낱말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금은 폭탄', '교육은 상거래', '여성은 물건'… 지난 11월 20일 출간된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의 표지이다. '한뼘책방'서 정성껏 갈무리하여 세상에 내놓은 나익주 작가의 신간 서적이다.
작가 나익주와 나는 같은 '58년 개띠'이기 때문에 함께 보낸 세월의 연식이 제법 오래일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익주 선생이 일곡의 어귀에 사는 나를 찾아온 것은 딱 10년 전, 2010년 11월이었다. 이후 나익주 선생과 나는 무슨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나의 집사람이 시샘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특수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강대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했으며,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레이코프로부터 인지언어학 이론을 배운 연구자 나익주. 그는 교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서 젊은 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보따리 장사(시간 강사)를 하였다. 낮에는 중등학교에 서 영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논문을 쓰는 성실한 연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느낌은 '교수의 꿈을 이루지 못한 불우한 학자'였다.
어느 날 나는 나익주 선생이 번역한 책이 15권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교수들 중 10여 권이 넘는 책을 번역한 분을 나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1년 당시 나는 전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학생들을 자주 만나고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만나고 싶은 명사가 있는가? 다 만나게 해주고 싶다. 단, 손석희만 빼고..."
그런데 한 학생이 전남대의 나익주 교수님을 뵙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익주를 어떻게 알았어?"라고 물었더니 서울의 친구가 전남대 나익주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 보라고 추천하였다는 것이다. "아, 광주는 나익주 선생을 몰라보지만 서울은 아는구나."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광주 사람들의 의식 구조 속에 광주 출신을 무시하는 습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연세대, 고려대에서는 나익주의 강연을 열었어도 아직까지 광주의 어느 대학에서도 나익주의 강연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 날 책 잔치의 백미는 제자들의 소회였다. 젊은 시절 10대의 청소년들과 함께 영혼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교사의 특권이지만, 30년이 넘게 사제 간의 우의를 돈독히 나누는 나익주 선생이 무척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기오(서강고 졸) ; "영어 수업은 기억이 안 나요. 선생님은 수업 시간 중에 '피.피.피' 노래만 불렀어요.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엔 싣고 어델 갔지" 선생님 때문에 동기들이 운동권으로 많이 빠졌어요."
조지명(광주동성고 졸) ; "나익주 선생님한테 거의 매일 두드려 맞았어요. 선생님은 정말 이상하게 하루 종일 나를 때렸어요. 당시 신고했으면 아마 처벌받았을 거요. 나쁜 담임이었어요. 그런데 이유는 모른지만 지금까지 찾아뵙고 있어요."
이은주(광주체육고 졸) ; "...(울먹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함)...3학년 때 우리학교로 오셨어요. 키는 큰데 근육이 없어 보였어요. 어느 날 아침 교탁에서 엎어치기를 해불까 생각하면서 가볍게 잡아당겼다가 그냥 놓아주었어요. 제가 유도선수로서는 대성하지 못했지만 선생님을 보고서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이후 교육대에 진학한 데는 선생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고요. 선생님은 지금도 저에게 교사로서의 역할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김은미(광주여고 졸);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적응하지 못해 몹시 힘들어 하였어요. 커다란 백팩을 메고 뛰어가던 모습,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모습이 생각나요. 무언가 끌리는 면이 있었어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교사로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은 창립식 때 밝힌 약속 그대로 가난한 인문연구자를 위해 조촐한 책 잔치를 열었다. 나는 '나이 육십에 저술의 뜻을 성취한 나익주 선생의 신간'을 축하하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읽어드렸다.
평생 두 가지 일에 종사했네 平生從事雙業耳(평생종사쌍업이)
낮엔 교직, 밤엔 연구 晝也敎壇夕硏究(주야교단석연구)
이제 저술에만 전념하니 今也專念唯著述(금야전념유저술)
그를 따르려 해도 따를 수 없네 雖欲從之末也由(수욕종지말야유)
- 일상 속 휴식 가능한 건축적 산책 공간 최근 광주광역시건축사회 회원 20여명은 대구 군위에 자리한 사유원 답사를 다녀왔다. 광주광역시 건축사회(회장 정인채) 회원 20여명이 함께 최근 사유원 답사에 다녀왔다.사유원은 대구 군위군에 위치한 곳이다. 광주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꽤 먼 거리라 생각하고 나선 길이 무색하게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심리적 거리는 1시간정도 되는 듯 했다.사유원은 대구의 향토기업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모과나무를 수집해 키우던 정원을 '사유를 위한 수목원'으로 조성하고자 승효상 건축가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구상하고 준비해, 2021년 9월 정식으로 개관했다.우리는 코르텐강판소재의 정문 '치허문'을 지나, 안내소에 도착했다. 생수 한 병과 답사지의 지도가 담긴 간단한 책자를 들고 '사유원'을 두발로 사유할 준비를 했다. 근래에 계속 된 비도 잠시 쉬는 답사 날, 봄의 기운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사유원은 철과 콘크리트로 된 계단으로 시작한다. 걷는 내내 소나무향과 흙 밟는 소리, 회원들이 가볍게 나누는 잔잔한 대화소리가 함께 했다. 간간히 답사임을 망각하고 '좋은 산책'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산책로를 따라 10여분 걷다 보면 첫 번째 목적지인 '소요헌'이 눈에 들어온다. 소요헌은 '자유롭게 거니는 집' 이라는 주제로 설계 된,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자연과 건축이라는 극명한 차이를 조화롭게 엮어 낸 건물이다. 노출콘크리트로 된 소요헌은 인공조명 없이 자연채광만으로 공간의 깊이와 빛의 질감을 아름답게 드러낸다. 빛을 따라 걷다보면 우직한 철문이 나타난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전면이 유리로 된 창과 건축 모형, 쉴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이 곳은 건축가의 방(요요빈빈) 이라고 한다. 알바로 시자가 디자인한 가구와 드로잉을 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알바로 시자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것'들에 영감을 얻고 발길을 옮겨, 사유원의 시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모과나무 정원 '풍설기천년'으로 향했다. 유재성 회장은 우연히 일본으로 밀반출될 예정이었던 모과나무 네 그루를 알게 되었고, 이 공간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모과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 된 귀한 나무들이었는데, 일본 분재로 모과나무가 인기가 많아 일제 강점기시절 부터 우리나라의 모과나무가 밀반출되었다고 한다. 이를 알고 유재성 회장은 모과나무들을 사 모으기 시작하였고, 무려 108그루를 한곳에 모아 가꾸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유원의 시작이다.300년 된 모과나무지만 아직도 연분홍색의 단정한 꽃이 피고, 향기로운 모과가 열린다고 한다. 자연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다.회원들과 얘기하며 걷다보면 어느덧 사유원 정상에 도착한다. 저 멀리 대구 팔공산이 보이는 이곳에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명정이 위치해 있다. 콘크리트로 된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지하로 내려가 하늘만 보이는 건축물과 만난다. 정상에 올라 좋은 풍경을 보았으니, 이곳에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명상하는 고요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 또한 이곳에서 한참을 물과 빛이 만들어준 그림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허만수 건축사명정 옆으로는 최욱 건축가가 설계한 카페 '가가빈빈'이 자리한다. 사유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지막한 단층의 '가가빈빈'은 사유원을 한없이 관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곳에서 향긋한 차와 함께하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광주에도 사유원처럼 건축적 산책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과 질투가 마음한 곳에 생겨난다. 물론 광주에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의 거리, 광주공원, 양림동 등 역사성과 랜드마크적인 요소가 있는 좋은 건축물과 장소가 있다.광주천이나 영산강은 산책할 수 있는 보행자 동선과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추어져 있다. 이를 활용해서 사유원처럼 숲을 거닐며 건축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이 강가를 거닐며 현대 건축을 만나는 경험 또한 광주시민에게 일상 속 휴식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허만수 사계절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 대표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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