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라는 책을 통해 서구사회가 초기근대의 딱딱한 고체성을 넘어 어떻게 유연한 '액체근대'로 진입하였는가를 분석한 바 있다. 다문화 되어가는 한국사회 역시 평생직장의 개념을 깨고, 세계 최고의 이혼율을 갱신하면서 액체근대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사회는 더 이상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기 힘들며,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결혼관계가 유지되거나 '한번 직장은 영원한 직장'이라는 고체근대적 관념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액체화되어가는 사회에서의 고체근대성에 대한 집착을 바우만은 '실패한 근대의 프로젝트'라고 보았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인구정책에 그 집착이 드러나 있다.
한국사회의 합계출산율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그 위기감은 지역소멸, 국가소멸로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여성의 '출산파업'이라는 가부장적 표현까지 등장한다. 모든 지자체는 저출산문제 해결에 생사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산장려'라는 용어까지 사용되면서 현재 대부분의 지자체는 현금성 지원정책들을 시행 중에 있다. 그러나 2023년 현재 합계출산율이 0.7명대로까지 떨어지고 있어 그 정책효과가 무색할 지경이다. 단순히 현금성 지원만으로 아이를 출산할 환경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과연 현재의 저출산 현상을 현금성 '출산장려'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바우만의 지적대로 '실패한 근대의 프로젝트'에 미련스럽게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인구구조의 변화에 매우 중요한 분기점은 고령사회로 진입한 2020년이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역인 베이비부머 1세대(1955년-1963년생)들이 노년으로 진입한 시기이며 생산연령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베이비부머 1세대인 1955년생이 65세가 되는 시점은 2020년이며, 1968년부터 1974년생인 2차 베이비부머가 65세가 되는 시점은 2033년부터이다. 즉, 한국사회는 그동안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던 베이비부머의 은퇴로 인한 부양비의 증가를 감당할 생산가능인구를 출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현재와 같은 현금성 출산장려 정책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액체근대적 특징은 MZ세대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엄(M)세대와 1990년대 중반 이후 2000년대 태어난 디지털(Z) 세대는 베이비부머들의 자녀들이다. 베이비부머들은 그들의 부모처럼 자녀를 5-6명을 낳지 않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하제한 시대를 거쳐 1-2명만 낳았다. 그리고 디지털 원주민이라 불리는 바로 이 MZ세대는 불변하는 아날로그적 '고체근대'의 막을 내리고 모든 것이 유연하게 변하는 '액체근대'를 열고 있다. MZ세대들은 스마트폰이 막 도입된 시대에 태어나고 적응하여 변화에 유연하고 새롭고 이색적인 것을 추구하며" 가족을 위한 희생과 같은 가치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쓰는 돈이나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또 다른 '액체근대'적 징후는 생물학적 남녀를 넘어선 다양한 성정체성에 있다. 미국 하바드대 주디스 버틀러 교수는 생물학적으로 남녀 어느 한 성(Sex)에도 속하지 않는 인구가 전 세계적으로 10%에 달한다고 '젠더트러블'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 물론 '고체근대'에서도 다양한 성정체성은 존재하였을 터지만 드러나지 않고 잠재되거나 은폐되었을 것이다. '액체근대'적 특징의 하나인 다양한 가족형태 하에서 결혼은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 하는 고체근대의 제도적 형식보다는 자유로운 파트너관계를 통해 보다 유연한 젠더질서를 갖는다.
그동안 주로 여성들을 변화시키는데 주력해왔던 여성정책은 양성평등정책을 넘어 남성과 함께 연대함으로써 이원화 속에 다층화되어 있는 불평등의 상호교차성에 대응하는 성평등 정책으로 패러다임 전환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지역성평등정책의 과제는 여성에게 주로 전담되어 왔던 일가정양립의 부담을 1인 노동자를 단위로 한 일생활균형으로 견인하기 위한 정책을 지역의 특수성에 맞게 개발하고 안착시키는데 있다. 일생활균형을 위한 정책개발은 고체근대성을 띤 선별적, 시혜적 형태가 아닌 액체근대적 보편주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1인가구 시대를 맞아 가족과 시장의 의존성으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보편복지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MZ세대들이 연애를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액체근대의 유연한 젠더레짐 하 '개인과 가족, 출산'의 삼각관계는 앞으로 성평등 정책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다. 한국사회는 바우만이 제기한 "실패한 근대의 프로젝트"처럼 더 이상 출산을 통한 고체근대적 가족관계를 강요할 수 없는 사회로 이미 진입했기 때문이다. 김미경 광주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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