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기억과 경험의 사유

@유형민 광주음악협회장 입력 2024.04.24. 10:45
공연리뷰-이머시브 연극 ‘FOOD’
유형민 전 광주음악협회장

오랜만에 보는 미국식 이머시브 씨어터 (Immersive Theatre) 연극이었다. 관객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참여형 극은 말의 언어보다는 배우의 신체 언어가 더 중요한 극이다.

에딘버러 페스티벌 출품작, 화제작을 광주에서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022년 미국 필라델피아 초연에서 큰 주목을 받은 뒤, 1년 7개월 동안 미국과 영국, 호주에서 전석 매진 신화를 기록한 제프 소벨(Geoff Sobelle)의 연극 '푸드(FOOD)'는 서울 강동문화재단의 초대로 서울과 공주에 이어 광주에서 아시아 초연을 선보였다.

거대한 식탁 (가로 6m, 세로 6.5m)을 30명의 관객이 둘러앉는 것부터, 아니 어쩌면, 하우스 오픈과 함께 극장 로비까지 울리던 재즈 선율이 식당의 '영업시간' 시작을 알리면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관객은 입장과 동시에 커다란 샹들리에 조형물과 거대하다 못해 기괴한 식탁에 압도당하면서 기대를 갖게 된다.

연출자이자 배우인 제프 소벨이 마치 웨이터처럼 차리고 서서 손님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뒷줄의 일반 관객석에 앉아 무대 위 '자발적 선택형 관객 배우 30명'이 메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미스테리한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보장받은 채 훔쳐보는 듯한 묘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마술사인 스티브 쿠이포와 함께 공동창작하고 리 선데이 에반스와 함께 연출한 제프 소벨의 연극 '푸드'는 먹는 것, 먹는 방법, 먹고 산다는 것, 그것보다 더 근본의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소벨의 낮고 기분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긴 테이블 위에 깔린 러너 중앙에 가짜 초를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최면을 걸듯 명상에 가까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20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연극 '푸드'의 모습

이내 '땡' 소리와 함께 깨어난 관객들에게 소벨은 와인을 따르기 시작하고 테이블석 손님들은 그 임무를 대신 수행하는 배우가 되어 움직인다.

와인을 앞 에 둔 관객은 처음엔 쭈뻣거리다 와인 향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추억을 편하게 털어놓는다. 극은 이렇게 '자발적 참여'와 준비된 대본을 읽게 하는 '의도된 참여'를 요구한다. 물론 대답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마술과 음향은 초현실적인 트릭이 되어 거대한 테이블을 순식간에 북극지방으로 만들고 그 위에서 매기를 잡으러 간 소벨은 얼음낚시 장면을 연출한다. 또 소벨은 테이블 위에 흙을 덮고 속에서 고구마를 키워내고 군고구마를 요리해내 마치 정말 뜨거운양 관객들과 너스레를 떨어댄다.

이런 시끌벅적한 디너쇼가 끝나고 난 후 모두가 떠난 식당으로 갑자기 설정이 바뀌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신발을 벗고 테이블 앞에 느긋하게 앉아 계산서에 끼워진 돈을 정리한 후 남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소벨과 관객은 처음으로 관객과 무대 위의 또 다른 타인으로 분리된다.

말 없이 사과 5개와 날계란, 방울토마토 한 그릇, 샐러리 1단, 밥 3그릇, 커다란 스테이크와 와인 2병, 피우던 담배와 보고 있던 휴대폰, 돈까지 먹어치우는 모습은 신기함에서 놀라움으로 이내 충격과 역겨움, 공포마저 느끼게 했다.

점점 변화하는 소벨의 표정에서 인간의 원죄인 폭식과 욕망, 탐닉을 다룬 브레히트의 발레 희곡 '소시민의 칠거지악'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무대 위 하얀 테이블보가 사라진 식탁은 '흙'으로 뒤덮인 지구로 변하고 그 땅 위에는 환영처럼 들소들이 떼를 지어 활보하고 곡식이 자라나고, 이 잉여물들을 운반하기 위한 교통수단이 생겨난다. 도시가 생겨나고 복잡해진다.

문명이 발달하고 그 모든 것의 소비 주체인 인간들은 살기 위해 최소한의 것만 취했던 애초의 섭취의 목적과 달리 먹기 위해 살고 쟁취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움직인다. 소벨이 관객에게 끊임없이 배우와 스탭이 되어 자신을 도와 무대를 완성하게 만드는 것처럼. 이머시브 연극 'FOOD'는 친절하지 않다. 진행조차 영어와 통역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관객이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명확했고 확고했다. 극장을 나서면서 내 머리에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먹는 것일까?' '우리의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일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극장에 어울리는 좋은 작품이었다.

유형민 전 광주음악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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