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잡학카페
'살이'는 어느 곳에서 기거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생활의 의미를 더하는 접미사이다. 하루살이, 겨우살이, 여부살이, 타향살이 등과 같이 '살이'는 완전함이 아닌 아직 부족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이분법적 논리에서 만들어진 언어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나 개개인들 모두는 잠깐 임시로 머물다 가는 '살이'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살이의 불안정성과 같이 더 극단적으로 소화기관이나 배설기관이 없는 동물은 없다. 그러나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항문이 없는 '빗해파리'와'관벌레'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바다의 극한 환경의 조건에서 완전한 소화기관이 없는 '살이'로 산다.
그런데 육지에서 사는 동물에게 소화기관이 없다면, 이전에 축적된 에너지를 모두 소비한 이후에 굶어 죽을 것이다. 이는 몸의 쓰레기 배설물이 없는 환경주의자이지만 불행하다. 이에 해당하는 동물이 하루살이다.
왜, 이름에 하루만 산다는 것이 붙어 있을까? 하루살이는 물속에서 1~3년을 애벌레로 살다가, 물 밖으로 나와 성충이 된다. 어른이 된 하루살이 성충은 입과 소화기관이 없어 일찍 죽는다. 하루살이는 오직 하루 동안 짝짓기라는 소명만 다하도록 진화 설계된 셈이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몸에 축적된 에너지가 소모되기 전에, 수 천마리가 모여 군무하며 수행 후 무더기로 죽고, 물가로 흘러가 알이 부활해 개체의 지속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소화기관이 퇴화·소멸돼 있어 이 수행에 실패할 경우 일주일 정도 배고픔의 고행으로 굶어서 끝내 죽는다. 7배 이상 긴 수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공동체 지속을 위해 하루를 사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공동체의 지속적 생존과 발전을 위해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장렬하게 막을 내린다. 수명의 연장과 자기보존을 위해 이탈한 하루살이는 주어진 소명, 임무, 권력을 자기 이익으로 사용한다. 이는 존재를 돋보이겠지만 결국 고통으로 죽어가고 공동체를 소멸시킨다. 그러나 대부분 하루살이는 오직 주어진 기간에 혼신을 다해 불나방을 자처한다. 하루살이는 주어진 연극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장엄하게 종막에서 내려오는 위대한 행위자이고 실천자다.
하루살이와 달리 인류 역사에서 비극은 리더가 자기보존을 위해, 끝내야 할 연극의 4막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공동체는 울분과 탄식 그리고 고통의 절망을 초래해 왔다. 하루살이가 하루와 7일 중에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것은, 마치 인간에겐 주어진 권력을 다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위해 선택할 것인가다.
선출직 4년 또는 5년의 주어진 임기 동안, 하루살이의 위대함처럼 공동체 생존과 지속발전의 의무자가 돼야 한다. 그래서 항상 자기보존의 권력자가 됨을 지양하는 의식과 각성이 필요하다.
주어진 하루, 일 년, 평생을 자기이고자 하는 자기의식은 자기 운명이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억지연명'이 아닌 니체의 '아모르파티'가 되는 길이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자기의식이 없거나 자신으로 있고자 바라지 않은 사람은 비극의 연명자이다. 그들은 가시적인 돈과 명예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결핍에 대한 욕망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루살이처럼 자기 자신이고자 의식하는 사람은 지배하지도 지배 당하지도 않는 위대한 하루살이다
하루살이가 위대한 하루를 포기하고 긴 일주일을 선택하는 것은 굶주린 고통의 죽음이다. 이는 마치 정치 권력이 인류, 국가, 시민을 위함이 아닌 자기보존을 위해 선택한 비극이다. 하루살이 삶처럼, 빛날 때 소멸하면 그 빛은 강하다. 이것이 소멸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김용근 학림학당 학장, 창의융합공간 SU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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