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빨치산의 딸, 정지아 소설이 연극으로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전문위원 입력 2024.08.26. 13:55
리뷰-연극 '아버지의 해방일지'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전문위원

처서가 지났음에도 여전한 무더위를 뚫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 지난 23일 저녁 서구 서빛마루 문예회관, 놀이패 신명에 의해 연극무대에 오르는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기 위해서다. 어느덧 객석은 가득 찬다. 놀이패 신명이 지역에서 그동안 쌓아온 연극 역량이 자연스레 사람들을 끌어당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정지아의 소설이 어떻게 무대화되고 풀어지는지를 직접 보고 싶은 그의 팬들도 상당수에 이른 것 같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되었다. 상복을 입은 주인공 아리가 무대에 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리는 차분한 어조가 가슴에 차갑게 콕 박힌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셨다는 아버지는 지리산 생활을 한 빨치산으로 두 차례에 걸쳐 2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지만 소위 민중을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다. 산 생활의 동지를 비롯해 산 아래에서 그가 호의를 베푼 여러 군상들이 나와 조문을 이어간다. 조문이 이어지면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를 관객은 단숨에 알아챈다. 아버지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일관했던 아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마음을 열고 따뜻한 태도로 바뀌어간다.

극이 치달아 가면서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받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객의 가슴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정지아가 아버지의 장례 3일간을 잔잔히 풀어낸 자전적 소설이다. 말이 3일이지, 그 3일을 통해 대한민국의 격동에 찬 현대사가 쫘악 펼쳐진다. 또 빨치산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이 녹아 있다. 어디 그뿐이랴, 빨치산의 딸, 주인공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때론 격하게 텐션을 높이는가 하면 때론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관객의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지정남의 각본과 연출, 너무나 놀라웠다. 극적 텐션감을 유지하는 연출력이 돋보였다. 조문을 온 사람들의 사연과 사연을 한데 묶어 짧게 처리하면서도 코믹하게 이끌어 극의 이해도와 관객의 흥미를 높였다. 원작에서 보여지는 유머와 위트를 무대언어로 바꾸는 것 역시 매우 세련되게 처리해 격조있는 웃음을 유발시켰다. 재밌었다.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먹먹한 아픔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적 장치도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조문을 온 사람들을 한 무대에 서게 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한 것이다. 한겨레신문을 들고 장례식장에 온 교련선생 출신 지인과의 대화 한토막, "자네가 신문을 못 보았을 거 같아서 가지고 왔네"에 "그렇지, 오늘 새벽에 죽느라 시간이 없어서 신문을 못 보았지"는 이 극 전체를 흐르는 위트와 유머를 대표한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화해는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며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형을 좋아했던 초등학생시절의 작은 아버지는 학교로 찾아와 고상욱을 아는 사람 있느냐는 국군의 총칼 앞에 "우리 형인디요, 마을에서 돼지잡고 잔치도 했었어요"라며 자랑스럽게 손들고 말한다. 그게 화근이 되어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할아버지는 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다. 이후 작은 아버지는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원망의 세월을 산다. 그것은 주인공 아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리고 젊었던 시절에 "공부 열심히 해야 쓴다"는 말에 "공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요? 빨치산의 딸이 무엇을 할 수 있어요?"라며 대들기 일쑤였다. 그러던 그가 장례 3일을 거치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씻어내고 해원을 한다.

이날 공연엔 광주시청 공무원들이 단체로 연극 마실을 했다. 너무 멋진 풍경이었다. 연극마실에 동참한 강기정 시장은 관람 후 원작자 정지아씨와 짧은 만남을 갖고 무언의 공감대를 가졌다. 관람내내 울었던 탓에 눈시울이 붉어진 정씨는 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우리들의 가슴에 잔득하게 남겨졌다. 대한민국 현대사가 어떻게 흘러와서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가만가만 되뇌이며 서빛마루 문예회관을 나온다. 다시 무더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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