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잡학카페
인류 역사 속에서 베토벤은 누구나 인정하는 음악의 거장이다. 그의 영혼을 울리는 대표작은 9번 교향곡 '합창'으로, 마치 고요 속에서 솟아오른 선율의 환희와도 같다.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작곡한 8번 교향곡 이후, 11년이라는 긴 고통 끝에 다시 피어난 작품이다. 이 곡이 1824년에 초연된 지 올해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기념 공연기획과, 학술회의, 전시회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선율과 역경을 넘어선 독립된 존재로서, 시대정신을 담은 시민의 의지를 음악에 새긴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에게는 평생 따라 다니는 혹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신분제의 꼬리표인 이름표였다. 그의 이름은 '루트비히 판(van) 베토벤'이며, 중간에 판(van)이 독일 귀족 출신인 본(von)과 비슷하다. 베토벤의 할아버지가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이주하면서 사용한 중간 이름이 판(van)이다. 조카 양육권 문제로 귀족법정인 란트레히트(Landrecht)에서 재판을 신청하여 진행했지만, van은 귀족이 아니라 하여, 평민법원으로 ㅤㅉㅗㅈ겨나 재판을 받았다. 이곳 재판에서는 베토벤은 위선적인 신분 도용자로 몰려 패소하고,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다. 이는 이름이 남긴 당시 신분사회의 비극적인 단면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서양의 이름은 로마 이전'에트루리아'인의 이름짓기 규정에서 출발한다. 이 규정은 이름, 출신(귀족, 작위, 지역, 직업, ...), 성씨(姓氏) 순으로 표기한다. 우리 한민족의 이름 짓기 규정은 원조상의 출신지, 성씨, 항렬, 이름 순의 세자로 이어진다. 광산 김씨 용자 항렬, 근(이름) 순이다. 문명이 태동하면서부터 이름 짓기의 전통이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뿌리 깊은 혈연 공동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의 성씨는 같은 씨족 이외의 결혼을 통해 그 결속을 지켜왔다.
오늘날 이름 짓기에서 전통의 의미는 희미해졌고, 그저 부족사회의 부산물인 성씨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대의 자유 시민에게 이름은 고유한 존재와 존엄을 담은 인격의 표식이다. 나는 이름이 있기에, 존재한다. 따라서 이름은 주체와 자아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름이라는 주체조차도 교환 가능한 하나의 숫자의 라벨로 취급되고 있다. 그 이유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행위마저도 거대한 물질적 체계 안에서 과학적으로 분석되기 시작한 결과 때문이다.
이름이 숫자로 환원된 예를 보면, 막장의 광부들, 학생들, 죄수들, 포로들, ... 그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관리 번호가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교도소에 있었던 김대중의 이름표인 수인번호는 9, 전두환 3124, 또 다른 대통령들은 716, 503 등으로 이름은 사라지고 숫자가 있을 뿐이다. 다른 예는, 감성을 나누던 음악방송마저도 이제는 '홍길자님이 홍길동님에게 보내는 곡' 대신, '휴대폰 번호 4321님이 1234님에게...'로 불린다. 이는 마치 이름을 잃은 죄수들이 신청하는 교도소 방송국이 되었다.
선비들처럼 호, 자, 아호, 초명, 등의 다양한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자신의 고유성과 주체성을 보여주는 위대한 유산이다.
나와 너를 부르는 아름다운 이름들은 사라지고, 우리 몸에는 숫자로 된 라벨이 덕지덕지 붙었다. 이제 우리는 감성의 문명을 잃고, 통제된 야만 속에서 이름을 잃은 존재가 되었다. 라벨이 아닌 진짜 이름으로 불릴 때, 내 안에 감성의 꽃이 피어났다. 이름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김용근 학림학당 학장, 창의융합공간 SU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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