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미래는 오롯이 하늘의 몫일 뿐이다"

입력 2022.02.16. 17:46 김봉일 기자
‘오뚜기 인생’ 완도 금일도 김병철씨
이른 아침, 김병철 이선희씨 부부가 동백마을 앞바다에서 다시마 솎음작업을 위해 양식밧줄을 끌어올리고 있다.?

봄기운을 머금은 완도 금일도 앞바다. 2월 바닷바람이 상당히 차갑다. 저 멀리 아침 공기를 가르며 오가는 작은 배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수천 그루의 월송마을 푸른 해송은 아름다운 자태로 세찬 바람을 막아주며 유유히 서 있다. 소나무 길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아침 햇살에 반사된 앞바다는 금빛 바다처럼 빛을 발한다. 금일 명사십리 금빛 모래는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린다. 조용하고 차분한 금일도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김병철(56), 이선희(49)씨 부부는 매일 아침 이런 소소한 일상을 맛보며 바다로 나선다. 어쩔 땐 어둠이 깔린 새벽 공기를 마시며 뱃머리로 향하기 일쑤다. 이들 부부가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미역과 다시마, 청각 등의 해조류와 어패류인 전복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끝이 보이지 않은 너른 바다에 양식면적 2㏊,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 이 조그만(?) 바다에 부부는 올인한다. 손을 놓고 있다간 알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어서다.


◆성실히 일해도 80%는 자연의 몫

속 모르는 사람들은 양식 시설물을 잘 만들어 놓고 가끔씩 관리만 하면 누구든지 가능한 일인 양 치부할지 모른다.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부표와 양식 밧줄만 설치해놓고 시간이 흐르면 손질 없이 저절로 자라날 것으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씨 부부의 해조류 양식과 어패류 양식은 버거운 일이다. 미역과 다시마 틀에서 채묘한 짧은 포자줄을 일일이 양식 밧줄에 끼워 넣은 뒤 부표를 달아 세팅까지 해야 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얼마만큼 해조류가 자란 시기엔 밧줄을 끌어올려 솎음작업과 염장작업, 햇볕을 잘 받게 하는 작업 또한 노하우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양식장에서 밧줄을 당겨 뿌리와 이파리를 분리하고 세척하는 등의 수확작업 역시 고단함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늘 하늘이 이들 부부의 편은 아니다. 간절한 기도를 수 백번 되뇌어도 자연은 호락호락 넘어가주는 법이 없다. 어느 땐 바다 수온이 높아 애써 기른 해조류와 전복을 몽땅 잃는 사태가 빚어지고, 또 어느 땐 폭풍우가 몰아쳐 지어 놓은 1년 농사를 깡그리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바다 일은 정말 끈기와 지구력의 싸움이다. 성실을 무기 삼아 진득한 마음으로 행복한 미래를 넘보기만 할 뿐이다. 8할은 오롯이 자연의 몫이다. 그래도 바다 일이 손에 익숙해지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기간 동안 부부는 오뚝이 같은 인생을 살았다. 반드시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삶의 자세로 임했다. 그래서 이들 부부의 연간 2억여원이라는 매출은 더욱 값지다. 봄철엔 미역, 여름철엔 다시마, 가을철엔 청각을 수확하고, 겨울철에는 주로 시설물을 점검하는 등 쉴 새 없는 고통과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야장천 전복양식까지 신경 쓰라고 한다면 보통 사람은 아마도 두 손 두 발 들었을 성싶다.

부부가 전복양식장에서 전복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고생 끝에 낙, 틀린게 없다"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습니다. 곁에서 보기엔 바다일은 제때에 맞춰 한꺼번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집안일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전혀 표시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일손을 놓자니 여태껏 공들여 키워놓은 해산물이 눈에 밟히고, 인력을 쓰자니 하루하루 인건비를 감당할 자신도 나지 않습니다. 몸이 천근만근이어도 죽으나 사나 둘이서 이를 악물고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씨는 "나이가 들수록 다람쥐 쳇바퀴 도는 바다 일이 너무 힘들어진다"며 "이젠 욕심내지 않고 편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열심이었던 김씨 부부 모두 양쪽 어깨의 인대가 끊어져 수술까지 받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 이씨는 요즘 무릎관절마저 어긋났는지 병의원을 밥 먹듯 들락거리고, 김씨는 인대 봉합수술을 받은 후 예전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맨 몸뚱이 하나로 10년 만에 '동백리의 기적'을 이룬 김씨 부부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고 부러워했다.

사실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 큰 형님과 함께 해조류를 키우며 자망 등으로 고기잡이에 열중하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가 친지의 요청으로 1년 남짓 미역 사업에 흥미를 느끼는가 싶더니 홀연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다. 지난 91년 초까지 마땅한 직업도 없는 그였기에 집 안팎에서는 극구 만류했다. 한번 마음먹은 결심을 되돌리는 그가 아니었다.


◆이어진 시련, 기술력으로 자립

서울 생활에 첫발을 디딘 곳은 성동구 성수동의 어느 초라한 자동차부품 생산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중매로 보성 출신 아내를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월세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워낙 성실하고 손재주가 남다른 그였던 터라 일단 회사에서는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은 항상 그를 괴롭혔고, 회의감마저 들었다. 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퇴직금은커녕 월급조차 받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때마침 건설계통에서 일하던 친동생의 도움으로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알루미늄 새시 일을 배웠다. 스티로폼과 패널을 결합한 단열 건자재를 조립하는 기술도 마스터했다. 당시는 사무실이나 공장건립 등에 조립식 패널을 활용한 건물이 인기를 누린 편이어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3~4년은 잘 흘러갔다.

안타깝게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전국적인 경제난으로 그곳도 예외일 순 없었다. 당장 몇 개월치 월급도 못 받았다. 이곳저곳을 수소문해도 정규직 일자리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건설일용직을 자청했다. 그의 기술력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일감이 몰려들었다. 경기, 충청, 전라, 강원도를 총망라한 전국적인 샌드위치 패널업자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축사도, 공장도, 사무실도, 주택도 그의 손을 빌려 지어졌다. 돈도 제법 벌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 지난 2009년 빌라 건축업자의 유리공사 하청업체로 계약을 맺었다. 한창 마무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빌라업자가 부도를 냈다는 것이다. 자재비와 인건비 등으로 고스란히 2억5천여만원을 날려야 했다. 그나마 24평짜리 전세금 1억원이 살아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돈은 다시 벌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40대 초반인 젊은 나이여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름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 있고, 집사람도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데다 야박하게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앞날에 지장이 있을 수 없다고 수없이 되뇌고 다짐했습니다."

완도 금일도 김병철씨.

◆올 결혼기념일에 첫 여행 계획

그러나 그의 다짐과는 달리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아내 이씨가 다단계 화장품 회사의 사업에 손을 대면서 엉겁결에 전세금까지 모두 날리게 됐던 것이다. 그때 그는 지방을 오가며 사업구상을 하는 중이었고, 아내의 소식을 접했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았다.

잠시 고향인 동백리에 가서 집을 지으려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들한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집에서 쫓겨나 살림살이가 모두 길거리에 나와 있다고 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일단 보관창고에 살림살이를 맡겨놓으라 전해놓고 고향땅에서 트럭을 몰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눈물이 운전하는 내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어 몇 번씩 못쓸 일을 겪게 되느냐며 하늘에 물어보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급한 대로 큰 형님에게서 살림살이 창고 보관비 150만원을 빌려서 지불하고,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죽으면 죽었지 완도에는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술회했다.

그는 계속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고향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든 늘 품어준다"며 아내를 간곡하게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김씨 부부가 고향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험난했다.

마침내 김씨 부부는 지난 2011년 10월 초 무일푼으로 고향땅을 밟았다. 어머니 집에 살림살이를 넣고 보니 잠을 청할 곳이 없었다. 부부는 큰 형님 공장에서 2년간이나 거주했다. 그때부터 이들 부부는 닥치는 대로 바다 일을 했다. 누군가 수군거려도 개의치 않고 억척스레 일했다. 살아갈 길이 서서히 보였다. 천신만고 끝에 집도 짓고, 1.5t짜리 선박도 구입했다. 바다 일만큼은 열일 제쳐두고 열심이던 김씨는 2018년과 2019년 동백리 어촌계장도 훌륭히 수행했다. 이제 그는 마을의 친목회인 '상록회'에서 바다환경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고, 아련한 자신의 과거 모습을 회상하면서 불우이웃 돕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결혼 이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믿어준 아내와 둘만의 행복한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는 김병철씨. 올가을 결혼 29주년에는 이들 부부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함박웃음을 웃으며 꿈에 그리던 여행을 반드시 떠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김봉일기자 amazingreporter@mdilbo.com·완도=조성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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