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스런 전통 예술품에서 지역 공동체 이벤트까지 '뚝딱'

입력 2022.03.30. 17:03 김봉일 기자
전통창호 장인·문화예술기획자 김경록 작가
전통 창호의 장인이자 문화예술 기획가로 알려진 김경록 작가의 손길과 머릿속만 거치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예스러운 예술품과 각종 문화 기획들이 거침없이 태어나고 있다.?

그의 손길만 닿으면 널브러져 있던 통나무가 예스러운 멋이 풍기는 가구로 태어난다. 세워도 보고, 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하고, 어루만져 뚝딱거리는 줄만 알았더니 어느새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전통 기물이 탄생한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놀이마당을 꾸미는가 싶더니 하나의 기획프로그램이 완성된다. 지역민들과 소통하면서 시(詩)·서(書)·화(畵) 배움터를 마련하더니 보란 듯이 토요문화예술학교를 개설한다. 일단 그의 손길과 머릿속만 거치고 나면 각종 예술품은 물론이려니와 이벤트도 톡톡 튀어나오는 것이다. 소목장(小木匠)이자 전통창호의 장인이고, 문화예술 기획자이면서 곡성지역 마을활동가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김경록(55) 작가.

?그와의 만남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낮에는 담양 수북면 창호공방 굉음소리에 연락두절 상태였고, 겨우 밤 시간대에만 곡성 옥과면 도립 아산조방원미술관 옆 숙소를 찾아가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숙소는 전통창호의 소목장이 기거하는 삶의 공간답게 한옥이었고, 그가 조방원미술관에 관심을 가진 이후부터 기획했을 것으로 보이는 포스터들이 벽 사방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 한의대 입학에 충격

모던한 감각을 추구하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한국의 전통, 그것도 상당히 판이한 전통창호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수줍은 미소로 화답하는 마음씨 여린 작가였다. 그는 서까래가 있는 천장을 응시하면서 그간의 삶이 복잡한 듯 긴 호흡을 내쉬었다.

"비전과 만족감이 없는 직장 생활이 싫었습니다. 뭔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직업으로서의 목수가 나이 들수록 근사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돌이켜봐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일부에서는 소목수로 일관된 삶을 살아가지 않고 문화기획 일을 한다고들 성화여도 저는 마냥 즐겁고 행복합니다. 인생에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단 한 번뿐인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길이잖아요."

김 작가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특이할지 몰라도 그저 묵묵히 여태 행해온 대로 그 길을 걷겠다고 했다.

누구나 삶의 양태가 판에 박힌 것처럼 똑같을 수 없듯 김 작가의 삶 역시 꽤 독특한 색채로 다가온다.

군복무를 마친 지난 92년 어느 날, 도올 김용옥 선생의 뉴스는 충격이었다. 세상에 쿨하고 박식한 도올 선생이 늦은 나이에도 원광대 한의학과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였다. 도올 선생도 천금같은 시간을 쪼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데 열심이거늘 '나'라는 사람은 그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을까. 곰곰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섬광처럼 머릿속을 때리는 깨달음은 바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 작가에게 그 떠올림은 바로 그림 그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부랴부랴 미술대학 입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조선대 미술대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4년 동안 학과 공부에 열심이었다. 디자인 전공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격려했다.

◆직장 환멸… 木壽 신영훈 선생에 매혹

첫 직장은 서울 강남의 한 벤처기업에서 출발했다.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신출내기 사원에게 떨어진 명령은 정보통신부의 홈페이지 디자인이었다. 거절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고, 엉겁결에 "할 수 있다"고만 대답했다. 그때부터 관련 서적을 날밤을 새우는 것은 일상이 돼버렸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감당하기란 정말 버거웠다. 6개월 만에 첫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런칭했다. 홈페이지 디자인은 멋지고 말쑥하게 꾸며져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러브콜 회사로 이직했다. 키오스크라는 정보전달시스템 제작사였다. 그래픽으로 항공기 운항정보를 승객들에게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회사가 요구하는 모든 작업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즐거움보다는 서글픔으로, 만족감보다는 허탈함으로, 일에 대한 열정보다는 줄서기와 눈치보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직장생활에 환멸이 느껴졌다.

문뜩 어느 소설책에서 읽었던 여섯 살배기 손주와 70대 할아버지의 동화 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강아지 집을 고쳐달라고 졸라대는 손주는 맥가이버 같은 할아버지의 뚝딱 뚝딱 수선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흐뭇한 미소로 화답하는 할아버지는 지긋이 손주를 바라보는 정겨운 장면이 연상됐다.

지체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목수'를 검색했다. 목수만 입력했는데 우연치고는 너무 필연일 만큼의 기사가 튀어나왔다. 지금은 작고한 대목장(大木匠) 신영훈 선생님의 기사였다. 가슴이 먹먹했다. 인문학적인 소양을 두루 갖춘 고(故) 신영훈 선생님처럼 문화재 현장을 누비는 걸 상상했다. 직업으로서 목수가 되기로 진지하게 마음먹었다. 한순간에(?) 인생의 향방이 확 뒤바뀐다더니 참으로 맞는 듯싶었다.

◆체력적 한계 전통창호법으로 전환

지난 2000년 곧장 신 선생님이 개설한 한옥문화원 2년 교육과정에 등록하려 했다. 아무리 입장을 설명해도 두 달 전 이미 개강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었다. 무조건 강화도 '학사재' 답사 프로그램만큼은 참가하겠다고 생떼를 쓰며 간청했다. 그마저도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멀리서 혼자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처음으로 바라본 '학사재'의 자태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순간부터 미친 듯 한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몇 개월을 기다린 끝에 한옥문화원에 등록했다. 교육과정을 마친 지난 2003년부터 2년간 신영훈 한옥문화원장 휘하의 고 건축계 대가들을 따라 열심히 다니며 현장에서 직접 전통 한옥건축기법을 익혀나갔다. 그러나 체력적인 한계가 발목을 잡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전통창호의 아름다움이 눈에 쏙 들어왔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심용식 선생님이 운영하는 전통한식창호 공방에 입문했다. 5년여동안 전통창호법을 사사했다. 지난 2007년에는 전통창호법을 연습할 겸 서울 청계천 9가의 반 지하 공간에 '달든㈜' 공방을 차렸다. 해가 기울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창틀에 걸려있는 달빛이 근사해 '달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통창호에 열정을 쏟았다.

그 '달든'의 이름이 너무 예뻐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산에서/ 나무를 내려/ 가로 놓고 세로 세웠다./ 나무는/ 문이 되었다./ 그냥 있던 여기에/ 문을 놓고/ 그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다가가자/ 모두 통하여 하나 되었다./ 해가 뜨자 해가 들고/ 달이 뜨자 달이 들었다/ 고운 문에 달이 들고/ 우리가 있는 여기를 달든이라/ 불렀다. 달든'이라고 말이다.

꾸준히 전통창호를 만들어가던 어느 날, 대목장 이광복(현 문화재보수기능인협회장) 선생님의 눈에 그가 띄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불광사 대웅전 불사에 참여해 창호제작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프로젝트를 놓고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미적거리던 그를 향해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었다.

최선을 다해 반년 만에 대웅전 창호를 완성했다. 이 선생님은 완성된 문틀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소목장, 장인으로서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리고서 달든 공방에서 전통창호와 가구들을 만들며 세월을 낚고 있던 터였다.

◆문화예술로 학생·주민에 도움

지난 2016년 초 아산 조방원 화백의 책자를 우연히 읽게 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곧장 도립 옥과미술관을 찾았다. 산세가 아름다운 지형 안에 멋지게 지어진데다 바로 옆에는 성륜사라는 절까지 있어 뭔가 할 일이 있겠다고 여겼다.

지속적으로 곡성지역 곳곳을 공부하던 그는 한국 판소리의 본향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래서 문화예술 전시나 공연 등 각종 문화기획도 마련한다면 지역주민과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2018년부터 그는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군교육지원청 등 당국의 후원을 얻어 청소년과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공동체 회복 이벤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다음해인 지난 2019년 3월 비어있는 아산미술문화재단 사무실로 삶의 터전을 아예 옮겨 생활하고 있다.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곡성지역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그만의 간절한 소망을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2022년 올해는 옥과에 국악전수관 설립에 전념할 방침이다. 구한말 최고의 소리꾼으로 알려진 장판개와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김명환씨와 같은 분들의 뜻을 계승발전하고 토대를 정립한다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세상살이는 종국적으로 인간관계인 것 같습니다. 작가와 주민, 관객, 기관들과의 소통의 문제라고 봅니다. 행위 다음에 오는 즐거움에서 그다음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전통창호의 장인으로, 디자이너로 때론 문화예술의 기획자 등으로 두세 가지 일을 추진하면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김경록 작가. 그가 전통 목조가구라는 형태로, 무대 위에 올린 행위예술의 향기로 군더더기 없는 작품을 표현해낸 것처럼 앞으로도 진정 꿈꾸고 소망하는 일들이 그의 방식대로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김봉일기자 amazingreporter@mdilbo.com·곡성=김성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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