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낮게, 소박하게, 따스하게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2.08.07. 13:06

얼마 전 마흔 가까워지는 제자가 방문했다.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문창과에 편입한 그 아이는 지극히 내성적이라 질문을 하면 그야말로 얼음 땡이 되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긴장 가득한 얼굴에서 나는 그 아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려, 말을 하려,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읽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다른 학생들이 짜증을 낼 정도로 기다리자 아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고, 어렵사리 나온 말들은 나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아이는 졸업을 하고 일 년 동안 낮에는 공장에 다니며 죽어라 글을 썼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가뿐하게 포기했다. 성실과 정직을 높게 본 것인지 인턴으로 들어간 제법 좋은 회사의 정직원이 되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일 년 뒤, 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향 근처로 돌아가 소를 키운다는 것이었다. 순하디 순한 눈망울을 꿈벅거리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묵묵히 내놓는 소와 그 아이가 찰떡궁합처럼 어울려, 천직을 찾았구나 싶었다. 소 키우는 게 제일 좋다던 아이는 이 년 넘게 나를 찾아오지 못했다. 주말도 없이 일하느라. 마침내 수익이 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쓸 정도가 되자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아이가 말했다.

"소는 좋은데 이 일을 오래는 못 하겠어요. 애들 눈을 볼 수가 없어요. 정이 들면 팔 수가 없잖아요."

먹잇감으로 팔려나가는 소에게까지 두루 미치는 그 아이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한다. 주목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보잘것없는 누구든 자기만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단 하나밖에 없는 양 몰아가는 세상 분위기에 있다. 무대에서는 스포트라이트가 한두 명의 주연에게만 집중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무대와 다르다. 삶의 무게는 주연이나 조연, 혹은 보이지 않는 무대 뒤의 스텝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삶의 기쁨이나 슬픔도 제각각 다른 순간에 모두에게 찾아온다.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좋으면 환호성을 지르고, 어떤 이는 아무리 좋아도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조금만 아파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아파도 죽을지언정 비명 따위를 지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른 삶의 방식을 놓고 어찌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다만 다를 뿐이다. 산에 가면 하늘을 찌를 듯 장엄한 나무도 있고, 키를 낮춰 그 아래 깃들어 사는 나무도 있으며, 또 땅바닥에 붙어 몇 줌의 햇살을 받고 어여쁘게 피어나는 꽃도 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두드러진 것들보다 소박한 것들이 좋다. 봄의 첫 햇살에 고고하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도 좋지만 그보다는 냇가에 흐드러진, 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버들강아지가 더 좋다. 화려하지 않지만 겨울을 닮은 듯한 잿빛의 솜털은, 햇살이 비칠 때, 저 누추한 것에도 봄은 오는가 싶게, 볼품없는 제 몸을 털어 빛을 튕겨낸다. 버들강아지들이 솜털을 살랑일 때, 나는 비로소 봄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세상에는 저 버들강아지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자본의 노예가 되어 무한속도로 질주하는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세상이 요구하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이 쓸쓸해질 때마다 나는 박용래의 시를 읽는다.

모과나무, 구름/ 소금항아리/ 삽살개/ 개비름/ 주인은 부재/ 손만이 기다리는 시간/ 흐르는 그늘/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족과 같이 어울려 있다.

보잘것없는 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으로 피어난 시를 읽으며, 그제야 마음이 넉넉해진다.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 아이가 박용래 시의 현화(現化) 같았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인생이란, 사람살이란 이런 것이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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