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희생은 피해가 되고, 피해는 희생이 되고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2.11.06. 13:13

어느 날 신이 아브라함을 불러 그가 백 세에 낳은 소중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은 뒤 아들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칼로 찔러 죽이려고 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제지했다.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태도에 흡족해서 대신 번제물로 바칠 양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희생양 이야기라면,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신약의 희생양 이야기이다.

서기전 431년 아테네의 정치인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해의 전몰자 합동 장례식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연설을 했다. 한참을 아테네 민주정의 위대함을 찬양한 페리클레스는 전사자들이 "그와 같은 나라가 침탈당하지 않도록 당연히 해야 할 도리로서 고귀하게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면서 "그러므로 우리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마땅히 떨쳐 일어나 이 나라를 위해 어떤 고난도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페리클레스의 이 연설은 모범이 되어 1863년 미국의 대통령 링컨에 의해 반복됐다. 남북 전쟁의 격전지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전사들이 보여준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똑같이 행동으로써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더 큰 희생 태세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독일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년이 지난 뒤 처음 번역됐는데, 그때는 별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8년부터 5만 부 이상이 추가로 인쇄되어 팔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탈영웅화 과정을 겪은 독일에서 집단적 굴욕감을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씻어내려는 반(反)탈영웅화 운동이 일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에서의 죽음을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묘사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죽음의 의미를 두고 벌어진 당대의 해석 투쟁에 이용된 것이다. 이 투쟁의 상대는 바로 전쟁에서의 죽음을 그저 헛된 죽음으로 보는 시각이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 미국의 반전 가수 에드윈 스타는 '전쟁'이라는 제목의 곡을 발표했다. 노래는 반복해서 묻는다. "전쟁,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아무것도 없지!" 노래는 전쟁이 생명을 그저 빼앗기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전쟁에서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나 어떤 고귀한 목적을 위한 헌신이 아니라, 그저 의미 없는 죽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냉전이 끝난 뒤 유럽인들은 체제 경쟁 속에서 지속되어온 '전사자 숭배' 문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야 비로소 찾아온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노력은 과거에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여겨지던 것을 '피해'로 묘사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전사자가 피해자가 되려면 가해자가 필요한데, 그 가해자는 과연 누구일까? 과거에 가해자가 적군이었다면, 이제 가해자는 전쟁 자체, 또는 한때 그 전사자가 자기 목숨을 바쳐 지키려고 했던 바로 그 국가가 되었다. 국가를 위한 숭고한 죽음 따위는 없으며, 국가에 의해 강요된 희생과 무고한 피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한 주 동안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를 두고 어처구니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정부는 애써 명백한 피해자를 '사망자'라고 불렀고, 그런 정부의 책임 회피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굳이 피해자를 '희생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죽는 것 아니었던가? 이들이 남을 위해 또는 대의를 위해 희생했던가? 156명이 죽고 187명이 다친 이 참사를 보면서도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사람도 없고, 대통령이나 조직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사람도 없으며, 오로지 억울하게 희생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만 있는 현실이야말로 오늘날 '희생자'가 아무런 숭고한 의미 없이 그저 '애꿎은 피해자'를 뜻한다는 것을 더없이 잘 보여준다.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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