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염을 잊을 만한 서늘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해본다. 2004년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지구가 급속히 빙하로 뒤덮이는 상황을 그린 기후 재난 영화이다. 뉴욕에 머물던 주인공 일행은 갑작스런 강추위를 피해 뉴욕도서관에 은신한다. 그들은 체온을 유지하려고 도서관의 책들을 불태우기 시작하는데, 니체의 책도 불속에 던져진다. 마지막까지 남은 책은 최초의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 성경이다. 사서였던 한 생존자는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인류 문명의 시작인 이 문화유산을 남겨야 한다며 책을 태우지 못하게 끌어안는다.
영화에서 언급된 것처럼 금속활자에서 시작된 인쇄 문명은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 월터 J. 옹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문자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추상적, 분석적 사고를 갖게 되었고, 감각의 변화마저 겪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히며 문자문화가 인간의 의식을 재구조화했다고 역설했다. 지금은 대학에서조차 독서 감상문 과제를 내면 학생들의 낯빛이 어둡게 변하는 시대지만 읽기가 스스로 사고하는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인공지능이 과제와 취업 준비, 고민 상담까지도 다해주는데 왜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의문스러운 얼굴을 향해 나는 인공지능이 책 읽기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고 항변하며 미안한 웃음을 짓는다. 뉴미디어 시대에도 비판적, 분석적 사고력, 논리적 추론 능력 같은 사유능력을 갖게 하는 독서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계획하는 능력의 원천이라고, 그래서 독서를 대체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인공지능 강국 대한민국의 독서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책 읽기는 희귀한 취미가 되었다. 근래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함께 책을 읽거나 낭송이나 필사(筆寫)를 하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는 ‘텍스트힙’이 유행하면서 20대 독서율이 살짝 높아지는 듯도 했지만, 이를 지속적인 독서의 증가로 보기는 어렵다. 국제도서전이나 북페어 같은 도서 관련 행사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소식이 반갑기는 해도 그런 현상이 독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이다. 책을 굿즈로 여기는 문화 현상 이면에는 읽고자 하는 열정보다 소비 욕망이 들끓고 있다. 책도 상품인지라 잘 팔려야 새로운 책이 출간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건 맞지만 그 과정에 ‘읽기’가 빠져있으면 곤란하다. 읽기를 거부하는 시대는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누락한 채 욕망을 향한 질주에 몰두하게 한다. 생각하는 인간 대신 소비하는 인간으로 재구조화될 우리의 미래가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성경을 끌어안는 심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지금의 독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AI 시대에도 우리는 책 읽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이어야 한다. 만약 온갖 콘텐츠에 마음을 뺏기느라 스스로 책을 읽기 어려운 시대라면 공적 차원에서라도 해법을 찾아야 한다. AI 교육만큼 독서교육도 공적 차원의 주요 현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난 7월 9일 방송된 광주 MBC 시사프로그램에서 민형배 특별시장이 밝힌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지역 발전의 동력이라고 믿는다면 책 읽는 시민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타인과의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면서 더 나은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참여하는 민주적 감각의 토대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읽기의 힘이기도 한다.
독서교육과 독서문화 도약의 토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공공도서관이다. 지금부터라도 공공도서관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면 가능한 대안이다. 기존의 광주광역시는 문화도시를 표방했지만 그에 비해 공공도서관 인프라는 뒤쳐져 있는 편이었다. ‘2025년 공공도서관 통계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타 광역시에 비해 도서관 수나 장서 수는 7개 특·광역시 중 최하위권이다. 도서관 시설 낙후로 인해 신도심과 구도심 간의 인프라 불균형도 나타나고 있으며 도서관의 다양성도 부족하다. 다행스럽게도 2023년 점자도서관이 개관했는데, 광역시로는 가장 늦은 개관이다.
이번에는 늦지 않게 시민과 사서의 의견을 수렴하여 메가시티 공공도서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공공도서관은 320만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문화와 지성 그리고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이다. 아직 건립중인 ‘광주대표도서관’이 어떤 모습으로 개관할지 모르지만 통합특별시의 위상에 부합하려면 화려한 외관보다 장기적 비전과 목표 설정에 힘을 모아야 한다. 민관의 대대적인 합의 속에서 공공도서관의 방향성을 정하고, 그에 기반하여 미래세대의 독서교육과 독서문화 확산 방안을 설계·실행하는 구심이 되어야 한다. 또한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야 하고, 광주전남통합특별시의 여러 도서관들이 소통할 수 있는 허브 역할도 맡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세상의 중심에 서서/구멍 난 내일을/헌신짝 같은 어제를/조용히 끌어안았습니다/도서관이었기 때문입니다/그것이 우리였기 때문입니다”(이근화, 세상의 중심에 서서)라는 시의 문장처럼 도서관은 “세상의 중심”이자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힘과 서로를 사랑하는 능력을 기르며 미래를 계획하는 장소이다. 영화 에서 인류의 종말을 예감한 주인공들이 도서관으로 간 이유는 죽음 앞에서도 우리가 인간임을 말해주는 증거가 거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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