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의 랩소디
해마다 겨울의 문턱인 11월이 되면 유난하게 하늘을 보며 첫눈을 기다렸다. 눈이 오지 않은 해도 있었고 12월이 되어서도 한참 늦게 눈이 내리는 때도 있었다. 첫눈을 백년손님이라는 불리는 사위처럼 모든 이들을 설레고 가슴 조이게 했다.
아이들은 눈이 올 때면 골목길로 나가 입을 벌리고 연신 허공에서 내리는 눈을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몸사래를 쳤다. 눈을 많이 먹은 사람이 재수가 좋으리란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눈이 쌓이고 어느새 천지가 하얗게 채워질 때면 장작과 대나무로 만든 썰매나 비료 포대를 들고 언덕으로 향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내리막의 스릴을 즐기며 행복에 겨웠던 유년의 시간이었다.
며칠 새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며 온갖 추억과 상념이 떠올랐다. 어떤 이는 낙하하는 수많은 눈송이가 세상 모든 이들의 이루지 못한 꿈과 그리움이 맺힌 것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때로 추억이며 바람이기도 하지만 아픔과 한(恨)이기도 하다.
눈을 온몸으로 견디는 것은 나무이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모든 잎들을 떨쳐낸다. 부족한 영양분을 비축키 위해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려는 생존의 방편이다. 그래서 모든 겨울나무는 나목(裸木)이 된다.
그렇게 모든 무게를 버리고 헐벗은 채 겨울을 통과한다. 그 헐벗은 가지 위에 내려앉은 눈은 또 다시 떨어져 땅의 해충과 바이러스를 없애고 지력을 보태며 한 해 농사에 도움을 준다. 서슬퍼런 한파 속에 쌓였던 눈이 조금씩 녹고 있다.
볼살이 떨리고 삭풍이 몸으로 파고들어도 봄의 축복을 위해 우리 모두는 견뎌낸다. 어두운 터널처럼 이어졌던 12월이 가고 을사년 새해가 밝은지도 열흘을 넘어섰다. 탄핵과 비상 계엄 등 험난한 정국 속에서 환율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오르며 경제 버팀목인 수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고 국민들의 지갑이 닫히면서 내수마저 꽁공 얼어붙었다.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은 일상사가 됐다. 청천벽력 같은 참사로 애꿎은 179명을 떠나보낸 유가족들의 슬픔 속에서 그 어느 해보다 차갑고 어려운 겨울을 지나고 있다. 이재무 시인의 시 '겨울 나무로 서서'의 싯구처럼 살다보면 삶이란 값진 하나를 위해 열을 바쳐야 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저 멀리 손을 흔들며 한걸음씩 오고 있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다. 최민석 문화스포츠에디터 cms20@mdilbo.com
-
(약수터) 광주, '디지털 노마드 도시'로 안 갈 이유 없다 생성현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 ChatGPT가 상상한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가 된 광주의 모습. /OpenAI '디지털 노마드'는 통신 기술을 매개로 특정 지역에 정착하지 않고 머물고 싶은 도시를 이동하면서 일과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을 말한다. 초연결망 시대를 맞아 원격 근무가 보편화되면서 디지털 노마드는 더이상 특별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특히 인공지능(AI)을 필두로 한 생산성 혁명은 디지털 노마드를 한층 더 보편적 현상으로 만들 것으로 보인다.그러면서 전세계 각 도시는 '디지털 노마드' 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디지털 노마드들이 숙박과 음식, 생활 등에서 많은 소비하는 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국내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이들의 다양한 DNA가 도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든다. 또 디지털 노마드가 모이는 도시는 자연스럽게 전세계에 입소문(바이럴 마케팅) 되고 더 많은 여행자가 찾는 도시가 된다.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로 불리는 태국 치앙마이가 대표적이다. 태국의 제 2도시라고는 하지만 광역인구가 겨우 100만명에 불과한 치앙마이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을 끌어모은다. 내륙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자원과 수려한 자연 환경과 저렴한 물가, 안정적 인터넷 환경 등이 이유다. 그러다 보니 디지털 노마드뿐만 아니라, '한 달 살기' 등 장기간 머물며 태국 전역을 여행하는 근거지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치앙마이를 방문한 한국인은 28만명에 달한다.이 같은 맥락에서 광주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디지털 노마드 도시'로 선포하는 건 어떨까. 광주는 디지털 노마드 친화 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민주주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에서도 그 중심에 있는 도시다. '자유'를 중요시하는 글로벌 디지털 노마드들에게 광주라는 도시가 단순히 '일하는 도시'가 아닌,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될 수 있는 요소다.광주 동구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사적지와 양림동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화유산 등 풍부한 역사 자원을 갖추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하는 '맛의 도시'라는 브랜드는 말할 것도 없다.무엇보다 호남 제1의 도시로서 선진화된 생활 인프라를 갖춘 반면 전국 대도시 중 가장 저렴한 숙박비가 최대 강점이다. 이에 더해 광주는 AI 중심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서울이나 부산이 대기업 중심의 IT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광주는 스타트업과 프리랜서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AI 기반 도시로의 잠재력이 충분하다.디지털 노마드를 끌어모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소비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광주에서 체류하며 만들어낼 상상할 수도 없는 문화적 다양성과 역동성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이들이 광주에 머무르며 전세계에 광주에 대해 알린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도시 브랜딩보다도 효과적일 테다.어차피 지금 광주의 조건으로는 전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힘들다. 이대로는 서울과 부산, 제주 정도를 제외하고 국제적인 관광 경쟁력 확보는 쉽지 않다.광주는 이들 도시와 아예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해 차별적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광주가 현실적으로 민주화운동의 도시라는 데서 나아가 '매력 있는 도시', '머물고 싶은 도시'가 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일 테다.그간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표방하고 돈을 써왔지만, 누가 과연 거기에 수긍할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하나 있다고 아시아 문화의 허브 도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아시아문화중심 도시가 되려면 아시아와 전세계의 DNA가 모여야 한다.광주가 그간 쌓아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예술 인프라는 디지털 크리에이터, 예술가형 노마드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AI 기술과 문화 콘텐츠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노마드 도시 모델을 광주가 선도할 수 있다. 넘쳐나는 빈집과 오피스 공간을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공간, 예컨대 코워킹 스페이스나 숙박시설로 내어줄 수도 있다. 광주의 무수한 기업들과 단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재밌는 작업들을 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광주는 동아시아의 디지털 노마드 허브가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광주가 디지털 노마드 도시로 도약할 기회다. 어차피 막기도 힘든 청년 유출을 걱정하기보다, 국내와 전세계의 젊은이들을 끌어모으는 게 더 역동적 도시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되레 국내 청년들이 모여들 가능성이 높다.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할 때다.이삼섭 취재1본부 차장대우 seobi@mdilbo.com
- · (약수터) 남행열차 타는 철새
- · (약수터) 신경전
- · (약수터) GGM 노조의 '사다리 걷어차기'
- · (약수터) 광주, 보통명사와 보통도시의 사이에서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