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객을 살아 있는 고통 앞에 마주
세우려면, 작가가 먼저 그 고통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고통 앞에서 관객을 울리려면,
작가가 먼저 울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오징어 게임을 보고 가장 먼저
받은 감동은 그 드라마의 이러저런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 작품을 구상하고
대본을 쓰면서 황동혁 감독이 얼마나
많은 밤을 울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관객의 눈물은, 예술가 자신이 세상을
위해 흘린 눈물에 대한 세상의 응답이다
가끔 내 책을 읽고 울었다는 독자를 만날 때가 있다. 그건 내게 최고의 칭찬인데, 그러면 나도 가끔은 그렇게 대답하곤 한다. 저도 그걸 쓰면서 울었습니다. 자기가 울지 않고 남을 울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책을 쓰려면 잉크가 아니라 “피로 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황문수 옮김, 75] 이해도 하고 얼마든지 공감도 할 만한 말이지만, 나는 잔뜩 겉멋이 든 그런 말보다는 차라리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가사가 훨씬 더 믿음이 간다. 피로 쓴 글은 읽을 수 있지만,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존재의 진리는 핏빛 구호보다는 읽을 수 없는 눈물로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온다. 읽을 수 없어도 같이 흘릴 수 있는 눈물 속에서 감추어졌던 존재의 진리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이 그렇게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하지만 눈물이 혼자 흘리는 것이라면, 그런 눈물은 아직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지 못한다. 진리는 오직 만남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눈물이 다른 사람의 눈물과 만나 같이 흐를 때, 비로소 역사는 시작되고 그 역사 속에서 존재의 진리도 개방된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의 눈물을 이어주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울어라 얘들아, 장미처럼 순수한 자들은 모든 시험과 고통을 타고난 유희처럼 견디어내는 까닭이다.”[릴케전집 1, 김재혁 옮김, 234]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릴케를 회상한 것은 그도 릴케의 시를 읽고 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나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읽을 때 목이 멘다. 그렇게 시는 이곳과 저곳, 그때와 지금을 눈물로 이어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물리적 세계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보다 참된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시인이 눈물의 매개자는 아니다. 횔덜린의 시는 심오한 감동을 주지만, 나는 그의 시를 읽고 울지는 않는다. 릴케조차 나이가 들면 우리를 울리지 않는다. 누가 <두이노의 비가>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읽고 눈시울을 적시겠는가. 서양의 시적 전통에서 눈물의 미학은 매우 낯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서양 미학에서는, 사람을 울리는 것은 아직 미성숙한 시인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암묵적 합의라도 있나 보다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정은 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공포와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말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눈물의 미학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 철학자는 <시학>에서 예술의 본질을 모방이라고 규정했는데, 모방이 주는 기쁨을 배움의 기쁨이라고 설명했다.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시학>, 천병희 옮김, 제4장] 배우는 것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 비극을 보면서 울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은 우리가 수학 문제를 풀면서 울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극은 수학적 진리가 아니라 삶의 진실, 그것도 비극적 진실을 모방한다. 당연히 그리스 비극에도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은 우리를 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두 가지는 분명하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놓인 비극성을 보편성 속에서 형상화해 보여주려 한다. 관객이 그 보편성에 함부로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스 비극 시인들은 등장인물을 모두 당대 현실이 아닌 신화에서 빌려 왔다. 그래서 2천 5백년 전 그리스 관객에게나 지금 우리에게나,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비극적 인간의 이데아로서 무대 위에 있다.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본질 속에 내재한 비극성 앞에서 전율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고통은 우리를 직접 자극하는 고통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드라마가 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극장을 뜻하는 그리스 낱말 ‘테아트론’은 보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보는 것은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보더라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고통과 슬픔이다. 고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참한 현실을 아무리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것이 곧 고통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세월호가 물에 잠겨가는 것을 티브이로 보면서 웃으며 밥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을 알았던 그리스 비극 시인들은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르는 것처럼 정말로 고통스런 장면은 연기를 통해 보여주지 않고 대사로 처리했다. 고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감독들은 그 불가능한 과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적 존재의 비극적 진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 한 사람 한 사람을 덮치는 현실의 비참과 대결한다. 똑같은 비극이라도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집요하게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이웃의 고통과 슬픔 앞에 우리를 마주 세우고,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고통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
그렇게 관객을 살아 있는 고통 앞에 마주 세우려면, 작가가 먼저 그 고통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고통 앞에서 관객을 울리려면, 작가가 먼저 울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오징어 게임을 보고 가장 먼저 받은 감동은 그 드라마의 이러저런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 작품을 구상하고 대본을 쓰면서 황동혁 감독이 얼마나 많은 밤을 울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관객의 눈물은, 예술가 자신이 세상을 위해 흘린 눈물에 대한 세상의 응답이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응답 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세계가 조금씩 인간적 온기로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낯설지 않게 들리는 ‘한류의 선한 영향력’이란 말은 한국의 예술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이 같이 흘리는 그 따뜻한 눈물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인류가 같이 흘리는 눈물의 렌즈를 통해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보이리라는 것도.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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