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오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는
똑 같이 야마구치현 출신으로서
4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이토오는 조선을 삼킬 목적으로
러시아를 설득하러 가던 중
하얼빈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베 신조는 평생 대단히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것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이토오나 아베가 동양평화를
주장했던 안중근의 사상에 귀를
기울였다면 한일 관계가 훨씬 좋아지고
세계평화에 기여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7월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선거유세 도중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나이 68세, 네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의 허망한 최후였다. 나는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의 한일회담 대표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아베 신조 부부와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아베는 머지않아 총리에 오를 유력 정치인으로서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부인 아키에 여사는 한국 TV 드라마를 즐겨 보는 한류팬으로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에 대한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다. 아베는 옆에서 웃으며 부인 말이 백퍼센트 사실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잠시 대화한 바로는 그는 꽤 호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아베는 예상대로 총리 자리에 올랐고 그 뒤로도 거듭 총리에 취임하여 도합 네 차례 총리를 맡았고, 총 3천일 넘게 자리를 지켜 역대 최장수 총리의 영예를 얻었다. 일본의 초대 총리였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네 차례에 걸쳐 총리를 맡았던 것에 비견할만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야마구치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68세에 총에 맞아 숨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야마구치현은 과거 이름이 조슈(長州)로서 봉건시대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소위 웅번(雄藩)이었다. 봉건시대의 번을 폐하고 현을 두는 조처(廢藩置)에 따라 이름이 야마구치현이 됐다. 야마구치는 가고시마(과거 사츠마번)와 더불어 메이지유신의 선봉을 섰던 지방이다. 두 지방은 역사적으로 사이가 나빴으나 봉건시대 말기 도사 출신의 우국지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두 세력을 묶는 소위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실현하여 메이지유신을 가능케 했다. 사카모토는 삿초동맹 실현, 그리고 봉건시대에 계속해서 실권을 쥐고 있던 쇼군의 권력을 빼앗아 왕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이 두 가지 큰일을 해낸 사실상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지유신이 성공하는 것을 못 보고 바로 그 전 해에 교토의 여관에서 괴한에게 암살되어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민소설가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가 쓴 라는 대하소설이 유명하고, 지금도 일본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 1위에는 오다 노부나가 아니면 사카모토 료마가 오른다.
야마구치현 출신 정치인 중에서 총리에 오른 사람만 해도 8명에 이른다. 초대 총리 이토오 히로부미, 3대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데라우치 마사다케, 이노우에 가오루 등,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아베 신조에 이르기까지 8명이 총리를 지냈다. 이 중 이토오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동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아주 나빴다. 앙숙 중의 앙숙이었다. 두 사람은 사상도 달랐고 스타일도 달랐다. 이토오는 자기 파벌을 만들지 않고 퇴근 후에는 유일한 취미가 술과 여자였다. 반면 야마가타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으로서 프러시아식의 국가유기체설을 신봉하고 민주주의를 완전 무시했던 극우강경파의 수장이었다. 야마가타는 자기 파벌을 만들어 밀어주고 당겨주는 전형적 일본식 파벌정치의 원조로 불린다. 야마가타의 영향으로 일본 육군은 대체로 군국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군비확장, 외국 침략, 대동아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이토오와 야마가타가 얼마나 사이가 나빴으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총에 이토오가 쓰러졌을 때 일본에서는 보나마나 야마가타 일파의 소행일 거라는 추측이 퍼질 정도였을까.
한편 일본 해군의 뿌리는 사츠마번(가고시마현)이다. 일본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노일전쟁 때 대마도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이긴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가고시마 한 마을 출신이다. 일본 육군이 프러시아 육군을 모방하는 바람에 자연히 정치적으로도 프러시아식 국가유기체설을 신봉한 반면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방한 영향으로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신봉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정치사상적으로 육군과 해군은 차이가 있었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온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야마구치현 출신으로서 야마가타의 오른팔이었는데, 나중에 역시 총리에 올랐다. 그는 조선을 통치할 때 최소한의 민주주의나 인권도 인정하지 않는 강압적 헌병통치로 일관했는데, 그 뒤의 조선총독들은 대개 그 노선을 따랐다. 다만 한 명 기미 3·1운동 뒤에 부임한 제3대,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만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다소 부드러운 노선을 취했는데, 그는 10명의 조선 총독 중 유일한 해군 출신이었다(그는 그 뒤 총리에까지 올랐으나 1936년 육군 강경파가 일으킨 2·26 쿠데타 때 무참히 살해됐다). 조선을 지배한 것이 일본 육군이었던 반면 대만 총독은 일본 해군이 맡았고, 그래서 그런지 대만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우리보다 훨씬 적고 실제 일본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이런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토오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는 똑 같이 야마구치현 출신으로서 4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이토오는 조선을 삼킬 목적으로 러시아를 설득하러 가던 중 하얼빈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베 신조는 평생 대단히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것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기시 노부스케는 젊은 시절 통산성 관리로서 만주국에 근무할 때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와 단짝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둘 다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도조는 처형됐고 기시는 운좋게 살아남아 전후 자민당 총재와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아베가 총리 시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물의를 일으킨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것이 아베의 한계다. 이토오나 아베가 동양평화를 주장했던 안중근의 사상에 귀를 기울였다면 한일 관계가 훨씬 좋아지고 세계평화에 기여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두 나라의 기구한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뭔가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이 글을 쓴다.?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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