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로 묶여있던 발걸음이 풀려
다들 여행의 붐 속에서 설레는 때다
이럴 때 고도가 갖는 이런 폐허의
미학과 결핍과 욕망의 그늘을
밟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
지금 옛 궁성들을 복원하여,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꿈에 부풀어 끊임없이
유적지에 손을 대고 있는 실정이다
자칫 근거 없는 자료로 인한 어설픈
복원이라는 누를 범할 수 있는 일이다
고도를 노래한 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그런 고증에 미흡한 복원보다는 폐허나마
온전히 보전하는 쪽에 더 감정의 무게를
싣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도의 여름
고도. 시간이 묻힌 둔덕과 평지로 울멍줄멍하니 펼쳐져 있다. 켜켜이 축적된 시간들을 덮는 현재성은 무성한 풀들이다. 망초 꽃들이 구름처럼 자욱하다. 노란 빛이 유난히 밝은 금계국 같은 외래종 꽃들이 쉼 없이 덮어 바람에 흔들린다. 자운영도 그 속에서 보랏빛 보료처럼 펼쳐진다. 자주 들르는 경주 남산은 야외 박물관으로 불릴 만큼 수많은 절터와 마애불, 탑들이 자리 잡은 가운데, 솔숲의 바람 소리에 휩싸여 있다. 최근 밟은 서남산 아래 나정에서 창림사지를 거쳐 포석정에 이르는 자락 길도 그런 무상과 욕망을 덮는 망초 꽃길이었다.
여름. 황혼 무렵. 경주 황룡사 터에 흩어져 있는 주춧돌들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횡하니 빈 터를 흔드는 풀들과 꽃들의 바람을 쉼 없이 느낀다. 들판 너머 펼쳐진 낮은 산들 위로 노을이 붉다가 보랏빛을 거쳐 회색으로 잦아드는 광경이 애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그 끝에서 오롯이 어둠에 휩싸이는 마음을 읽는다. 고도에 올 때마다 맞닥뜨리는 전형적인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새롭게 꾸며 고대의 시간성을 현대성과 이어주는 곳도 있다. 공주가 그런 곳이다. 공주 역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공산성과 무령왕릉과 왕릉원, 마곡사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3곳이나 보유하고 있다. 백제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대 역사를 체험해 볼 수 있으면서도 나름 복원이 계속 이루어져 새롭게 단장된 것들과 조화를 꿈꾸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 다녀온 공산성은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의 아득한 조망이 일품이었다. 특히 구름보기가 좋았다. 그런가 하면 유구의 색동수국정원은 6월~8월까지 많은 사람들이 수국축제를 위해 방문하는 곳으로 다양한 색의 수국들이 조성되어 있어서 고도의 분위기를 새롭게 각인시키는 이색적인 풍광으로 눈길을 모은다.
경주와 공주의 이러한 대조되는 풍광은 결국 다 아득한 기억의 풍광들이다. 고도는 옛 영화의 기억과 그 외양이 소실된 폐허의 이미지가 잔존하는 곳이다. 그 자리에서 특별한 공간이 갖는 시간성과 결핍과 욕망의 그늘을 읽는다. 두 지역이 다 세계 문화유산을 다수 품은 세계적인 도시라는 점에서 그 공간이 뿜어내는 기운은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으로 우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코로나로 묶여있던 발걸음이 풀려 다들 여행의 붐 속에서 설레는 때다. 이럴 때 고도가 갖는 이런 폐허의 미학과 결핍과 욕망의 그늘을 밟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
-경주 시들
그런 가운데 고도 경주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들을 한 데 모은 '경주를 노래한 한국의 명시전'이 열려 눈길을 끌었다. 경주 문정헌에서 경주를 소재로 쓴 시인들의 시들을 시판으로 전시하고 시첩을 발간하면서 시낭송음원으로 들려주는 제1회 문정헌 멀티시전 기획을 경주 펜 지역위가 마련한 것이다. 유치환 김동리 조지훈 박목월 김춘수 오규원 등 작고문인들과 윤석산 정호승 이성복 송재학 정일근 백무산 장석남 등 20명의 시인들을 초청했다. 모두 경주를 노래한 시들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고도 경주의 범 문단적 문학화가 꽤 심화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들 외에도 우리 문인들 가운데 경주를 노래한 시들이 적지 않음은 물론이다. 송욱과 서정주 등 뛰어난 경주 관련 시들을 남긴 시인들이 꽤 있다. 앞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개괄적으로나마 집대성해보이겠다고 경주 펜 지역위는 욕심을 나타내고 있다.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유치환의 시 '석굴암 대불'의 앞부분이다. '통곡을 견디는 돌'인 석굴암 대불을 통해 천년의 핏줄이 흐르는 숨결을 소통하는 장쾌함과 비장미가 드러난다. 이런 느낌은 "사람 가고 대는 비어 봄풀만 푸르른데/ 풀밭 속 주추조차 비바람에 스러졌다"라는 조지훈의 고전적 시간 인식과 더불어 무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산이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정일근)의 순례의 여정이 있다. "골짜기마다 코 떨어지고 목 사라진 돌부처/ 앉음새 고쳐앉은 몸에/ 금강소나무 같은 굵은 팔뚝이 툭, 툭 불거진다"(장옥관)는 마애의 육체성을 새삼 새기기도 한다. 특히 남산의 유적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데, 백무산은 "오늘에서야 처음 본 탑이지만/ 탑은 나를 천년도 넘게 보아온 듯/ 탑 그림자가 내 등을 닯았습니다"라며, 창림사지 탑을 자기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금팔찌 한 개를 벗어주고/ 선덕여왕께서 떠나신 뒤에/ 지귀야,/ 네 살과 피는 삭발을 하고/ 호젓이 혼자서 타지 못할까"라며,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를 현대의 삶 속에 불러내는 소리도 있다. "주춧돌 하나하나 마다 앉아서 한 시간 쯤씩/ 아니 하루쯤씩 앉아 있어보고 싶었습니다"(장석남)라는 폐허에 동화되는 아득한 시간 의식을 내비치기도 한다.
경주뿐만 아니라 공주와 전주, 그리고 김해와 고령 등 옛 궁성이 있었던 도읍지들의 유적지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이들 고도들에 대한 시인들의 감정이 다채롭게 반응되고 있는 것을 이 전시를 통해 확인했다. 이 지역들은 지금 옛 궁성들을 복원하여,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꿈에 부풀어 끊임없이 유적지에 손을 대고 있는 실정이다. 자칫 근거 없는 자료로 인한 어설픈 복원이라는 누를 범할 수 있는 일이다. 고도를 노래한 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그런 고증에 미흡한 복원보다는 폐허나마 온전히 보전하는 쪽에 더 감정의 무게를 싣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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