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시가 묘사하는 대립은 인간 내면의
대립과 갈등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자기 자신과 대립한다. 레스보스 섬의
시인 사포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정시적
대립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대립이다
그리하여 서정시는 삶의 대립을 공간적
방위가 아니라 시간적 변화 속에서 현시한다
빛나던 과거에 대한 추억, 그런 과거에 비해
초라한 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동경이 교차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내면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오래전 책에 쓴 말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드라마가 처음 탄생할 때, 드라마는 서사시와 서정시를 종합한 예술형식이었다.('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네 번째 묶음) 이 세 가지 고전적인 시문학의 형식이 모두 삶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을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각각이 다루는 대립의 내용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서로 같지 않다. 서사시는 대립을 외적으로 현시한다. 신들의 세계는 하늘에 있고 인간의 세계는 땅에 있다. 그리스인들의 군대는 바닷가 뱃전에 있고 트로이인들의 군대는 육지의 성문 앞에 있다. 이 공간적 배치 위에서 현시되는 대립은 인물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그리하여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대립을 대표하고 또 실현하는 주체들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자면, 서사시가 묘사하는 대립은 자기와 타자와의 대립이지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대립이 아니다. 호메로스 역시 가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내비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은 서사시에서는 부수적인 요소일 뿐, 대립은 언제나 외적으로 현시되며 내면의 갈등은 단지 암시될 뿐이다.
이에 반해 서정시가 묘사하는 대립은 인간 내면의 대립과 갈등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자기 자신과 대립한다. 레스보스 섬의 시인 사포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정시적 대립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대립이다. 그리하여 서정시는 삶의 대립을 공간적 방위가 아니라 시간적 변화 속에서 현시한다. 빛나던 과거에 대한 추억, 그런 과거에 비해 초라한 나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동경이 교차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내면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를 종합한다. 여기서도 대립은 서로 다른 주인공을 통해 외적으로 현시되지만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다. 더 나아가 대립이 객관적 상황에 의해 촉발될 뿐만 아니라, 내면의 갈등이 객관적 대립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을 때, 그는 군주로서의 의무와 아버지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것은 객관적 대립이 주관적 갈등을 유발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경우는 이런 인과관계가 정반대로 나타난다. 거기서는 삶의 현실적 대립이 마음의 일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뜨겁던 사랑도 흐르는 시간 속에 차갑게 식고, 그렇게 식어버린 사랑은 다시 불타는 증오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변화가 현실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극적인 대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드라마에서 삶의 객관적 대립이 서사시적 요소라면 한 인간의 내면의 갈등은 서정시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드라마가 마음의 고통을 현시할 때, 그것은 서정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에서 드라마가 현시하는 내면의 고통은 원칙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고통이지 타인의 고통이 아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무대 위에서 대립할 때, 안티고네만이 아니라 크레온 역시 고통받는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관객의 일이다. 그러나 안티고네도 크레온도 상대방의 고통을 헤아리지는 못한다. 그들은 어느 쪽 가릴 것 없이 자기 자신의 고통 속에 갇혀 있다. 이런 사정은 근대 비극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햄릿도 파우스트도 모두 깊은 내면의 고통을 겪지만, 남의 고통을 헤아리지는 못한다.
이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내면의 고통을 겪는 것은 드라마의 서정시적 요소인데, 서정시 자체가 남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침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형도가 남긴 거의 모든 시는 넘치는 자기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시인은 자기 자신을 가엾어한다. 그러니 드라마가 서정시처럼 내면의 고통을 묘사한다 해서, 드라마의 주인공이 타인의 고통 때문에 번민하거나 갈등과 대립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대시인들 가운데는 이런 서정시의 상식을 거스르는 시인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송경동의 '그해 여름 장마는 길었다'는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의 싸움은 장마처럼 길었다/와? 와아? 와아? 하며/뱃일을 다니는 사내가 밑도 끝도 없이/세간살이 하나하나를 깨나갈 때마다/부둣가 다방엘 다니는 동거녀는/썰물에 씻기는 모래알처럼 쓰러지며/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 하며 흐느꼈다//나는 그들의 옆방/달에 10만원짜리 생활 속에 텅 빈 소라껍데기마냥 기구하게 누워/불도 켜지 못한 채 서러웠다"
이 시도 자기의 서러움을 말한다. 그러나 자기의 서러움은 이 시에서는 부수적인 슬픔이다. 이 시를 압도하는 비극적 아우라는 자기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스런 기억을 소환하면, 그것은 다시 보편적인 비극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왜? 왜?/왜 그랬는데?/물어도 물어도 서로 대답 없는 뭍처럼 파도처럼/끊이지 않는 이 싸움은 언제나 끝나런가/
이런 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과 매개하면서 보편적 고통의 바다로 나아가는 시적 모험은 한국의 현대시를 관통하는 유구한 전통이다. 이를테면 70년대 씌어진 신경림과 이시영 시인의 시들은 오로지 한국 전쟁기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처절한 슬픔을 그들 대신 말하기 위해 쓴 것처럼 보인다. 다른 나라에도 그렇게 시를 쓴 사람들이 있었던가?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 된 경우가 있었을까? 알 수 없으나 한국의 현대시인들이 서정시의 교과서적 문법을 거스른 새로운 전통을 정립한 것은 분명하다.
오징어게임이 에미상의 여러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라마가 내면의 고통을 그리는 한에서, 그것은 서정시적이다. 오징어게임의 주인공들도 각자 자기의 내면의 고통을 안고 있다. 그것을 잘 표현해 낸 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오징어게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관객을 가장 많이 울렸을 제6화에서 지영이 새벽을 살리기 위해 구슬치기 시합을 스스로 포기했을 때, 그리고 일남 노인이 깐부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마지막 구슬을 기훈에게 주었을 때, 우리는 출구 없는 비극 속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한 줄기 빛을 보게 된다.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살 수 있는 지옥에서도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의 빛을.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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