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의겸은 국정감사를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정치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법무부 장관 한동훈을 상대로
'윤석열 대통령·김앤장 변호사 30여명과
심야 술자리'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야기거리
소재들이 풍성한 썰을 선보였다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쇼를 위해
'지라시 정치인'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치겠다는 그의 희생 정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시카고에 뮬러라는 이름을 가진 교통경찰관이 있었다. 그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일하던 그는 원칙대로 모든 불법 주차 차량에 대해 티켓을 열심히 발부했다. 벌금을 물게 된 많은 운전자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얼마후 그는 변두리 지역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는 주차 관련법이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 일종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머리 에델먼의 [정치의 상징적 이용](1964)이라는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상징'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쇼'라는 말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누군가가 "선거는 쇼에 불과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그 의미를 즉각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선거철엔 근본적인 사회개혁의 구호들이 난무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 구호들은 까맣게 잊혀지고 예전의 사회 질서와 관행은 다시금 반복된다. 공약(公約)은 곧 공약(空約)이라는 건 상식이 되고 말았다. 에덜만의 말을 빌리자면, "투표는 참여의 의식적(儀式的) 표현으로서 개인적인 희망과 불안을 발산하는 동시에 공공정책과 법규에 순응할 의무의 확인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국정감사는 어떤가? 이 또한 상징 또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언론 보도만놓고 보자면 그렇다. "'갑질 국감' '호통 국감' 제발 그만둬라" "국정감사, 언제까지 막말과 파행으로 이어갈 건가" "'심심할 테니 묻겠다' … 26명 불려나와 14명 대기하다 퇴장" 2014년에 나온 신문 기사 제목들이다. 다음 해엔 달라졌을까? "13시간 기다려 13초 답변 … 기업인 '질문않는 의원 더 밉다'" "왔다가 그냥 간 증인 31명 … 누가 왜 불렀는지 실명 밝혀야" "여야, 국감 증인 신청 실명제 바로 도입하자" "최악의 부실 국감 이대로는 안 된다" 등과 같은 기사 제목들이 말해주듯이 달라진 건 없었다.
지난해엔 "호통·맹탕·저질…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한 '국정감사 무용론'", 올해엔 "무용론 논란 국정감사, 언제까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등장했다. 어김없이 매년 반복되는 연례행사다. 그래서 국정감사 관련 기사엔 꼭 국회의원들을 비난하면서 '국정감사 무용론'을 부르짖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곤 한다.
'국정감사 무용론'은 국민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다른 평가가 가능해진다. 8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선희는 국정감사를 다룬 칼럼에서 "국감에 '30초 호통'으로 끝낼 기업인들을 부르는 건 국회의원들이 기업인들과 안면을 트고 정·재계 유착고리를 만드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항간의 의심이 있다"며 "국감엔 보이는 앞마당과 보이지 않는 뒷마당이 있단다. 앞에서는 국회의원들이 호통치지만 뒷마당은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를 나누는 장이란다"고 했다.
오래 전의 이야기인지라 지금도 그런 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국회의원들은 일반 국민과는 다른 입장과 관점에서 국정감사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감사에서 열변을 토하는 국회의원의 주요 청중은 국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이다. 5년 전 조선일보가 소개한 "베테랑 공무원이 말하는 국감 편하게 치르는 법"(금원섭 기자)은 바로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 기사에 나오는 세가지 요령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원이 최대한 길게 발언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게 기본이다. 1년에 한 번 TV로 생중계되는 국감장에서 지역구 유권자들을 향해 본인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며, 공무원이 답변을 하겠다며 의원 발언 시간을 축내거나 말을 중간에 끊는 눈치 없는 행동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둘째, 정부 행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원에겐 고개를 연신 끄덕여 줘야 한다. 발언을 마친 의원을 향해 "오랜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치켜세워주는 것도 필요하다. 행여 의원 지적에 사사건건 반박했다가는 '유권자 앞에서 의원을 망신 준 것'이 돼, 머지않아 큰 화(禍)를 입게 된다.
셋째, "지적하신 문제점을 반드시 시정하겠다"는 마무리 멘트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유권자들이 "우리 지역구 의원이 힘 세구나" 하는 인상을 받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의원의 체면을 세워준 뒤, 나중에 따로 찾아가 그렇게 안 되는 이유를 밝히고 양해를 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정도면 '국정감사 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언론은 아무리 지적해도 바뀌지 않는 국정감사의 문제점만을 비판할 게 아니라 국정감사를 '쇼'라고 하는 엔터테인먼트의 관점에서도 다뤄보는 게 어떨까? 그럴 뜻이 있다면 나는 '2022 국정감사 쇼'의 대상(大賞) 후보자로 민주당 의원 김의겸을 추천하고 싶다. 추천 사유는 다음과 같다.
김의겸은 국정감사를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정치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10월 24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법무부 장관 한동훈을 상대로 '윤석열 대통령·김앤장 변호사 30여명과 심야 술자리' 의혹을 제기하면서 청담동 고급바, 그랜드피아노, 여성 첼리스트, 술, 윤도현 노래, 동백아가씨,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등 이야기거리 소재들이 풍성한 썰을 선보였다.
한동훈은 10여일 전 김의겸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직을 걸라"는 말을 되돌려주면서 "저는 다 걸겠다. 의원님은 무엇을 걸 것인가?"라고 물었지만, 김의겸은 나중에 입장문을 통해 "뒷골목 깡패들이나 할 법한 협박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며 당당하게 받아치는 묘기를 보여 주었다. 40일전 민주당 의원 이재정과 관련된 거짓말로 한동훈을 모욕하고서도 사과하지 않은 김의겸의 배포가 다시 돋보였다.
진중권은 김의겸의 묘기를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규정하면서 "어떻게 저런 분들이 세비를 먹고 저걸 지금 의정활동이라고 하고 있는가"라고 개탄했지만, 김의겸은 그 어떤 비판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쇼를 위해 '지라시 정치인'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치겠다는 그의 희생 정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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