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서정주와 고은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입력 2022.12.14. 18:52

사람의 행적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군림하게 되면 시는 필경 그 사람의 그늘에서

희생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어떤 시인도

자기가 쓴 시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이 그 자체로서 시처럼 아름답다면,

우리가 시를 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시인의 삶은 그가 쓴 시에 비해

누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석에 오물이 묻었다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처럼, 더러는 정치적 기준으로 더러는

윤리적 기준으로 사람과 함께 시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음악도 계절을 탄다. 봄에는 봄에 맞는 음악이 있고, 가을에는 가을에 맞는 음악이 있다. 아마 사람마다 계절 따라 즐겨듣는 노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내가 가을이면 듣는 노래 중에는 송창식씨의 노래 '푸르른 날'도 있고 최양숙씨가 부른 '가을 편지'도 있다. 교양이 없는 나는 이 두 노랫말이 유명한 시인의 시라는 것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누가 쓴 노랫말인지 몰랐던 까닭에 나는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그 노래를 그냥 듣고 좋아할 수 있었으니까.

두 노래 가운데 가을편지가 먼저 나왔고, 나 역시 그 노래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푸르른 날'은 늦게서야 알게 된 곡이다. 자연과 그다지 친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2005년 전남대학교에 부임한 뒤에 한동안 규칙적으로 서울과 광주를 오가면서, 초록이 지쳐 단풍 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 알았다. 광주에서 전주 사이를 버스나 기차로 지나노라면 거의 개발되지 않은 너른 호남 들판은 여름 서너 달 동안은 집과 길을 빼고 나면 오로지 초록색 말고는 다른 아무 색도 보이지 않는다. 작열하는 여름 햇살 아래 사람은 죽처럼 풀어져도, 그 끈질긴 생명의 초록빛은 태양의 열기에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짙어지고 또 짙어진다. 누가 저 생명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까. 태양은 초록의 저항을 어쩌지 못하고 결국 누그러지고, 그렇게 여름이 기울면, 초록도 지쳐 안으로 단풍 드는 것이다.

'푸르른 날'을 듣기 전에 나는 오랫동안 서정주를 혐오했었다. 아니 멸시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나는 그 시인을 황진이보다 못한 기생이라고 야유했다. 황진이는 자기가 기생인 것을 알았으나 서정주는 자기가 기생인 것조차 몰랐던 기생이었다고. 이유는 한 가지, 그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해방 후에는 독재자들을 위한 시를 썼기 때문이었다.

'푸르른 날'의 가사가 내가 그렇게 혐오하던 시인의 시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난감했다. 어째야 할까? 이제 이 노래는 듣지 말아야 할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시의 아름다움이 이미 나를 사로잡아버렸으니,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서는 그 노래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곡의 노래 때문에 나는 서정주의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화상'을 읽으며, 그에 대한 오랜 미움을 내려놓았다. "애비는 종이었다"고 시작하는 그 시에서 시인은 세상이 자기를 뭐라고 부르든 자기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도덕을 거부하는 것도 용기이다. 그렇게 시시비비를 포기한 젊은 시인은, 마치 자기 미래를 예언하듯이,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자기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언제나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타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는 시의 아름다움에서 구원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시를 요구하면, '옛다, 먹고 떨어져라'는 심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시를 써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편한 손님이 떠나면, 다시 그는 가을 꽃자리를 보며 다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 그 그리움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있었겠는가.

최양숙의 '가을편지'의 노랫말은 고은 시인이 썼다 한다. 몇 해 전 그 시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투 사건으로, 그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 두어야 한다, 왈가왈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추행은 입에 올리기 민망한 일이지만, 나는 이 가을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을편지'를 들었다. 어쩌겠는가. 시인이 아무리 추해도, 그의 추행이 그가 쓴 시의 아름다움을 더럽히지 못하고, 시도 노래도 사람이 짓는 것이지만, 짓고 나면 더는 그 사람 소유가 아닌 것을.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책에서도 인용하고 평소에도 자주 언급하는데, 그 시인은 1981년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소속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고, 서정주처럼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도 썼다. 내 편에서 보자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적이지만, 그래도 나는 끝내 그의 시 '꽃'을 버리지 못하고 애지중지한다.

시인도 세속의 존재이므로, 정치적 대의와 윤리적 기준에 따라 시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여 우리는 사람의 행적으로 그 사람이 쓴 시를 판단하고 평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대개 그 이유는 시의 아름다움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행적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군림하게 되면 시는 필경 그 사람의 그늘에서 희생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어떤 시인도 자기가 쓴 시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삶이 그 자체로서 시처럼 아름답다면, 우리가 시를 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시인의 삶은 그가 쓴 시에 비해 누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석에 오물이 묻었다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처럼, 더러는 정치적 기준으로 더러는 윤리적 기준으로 사람과 함께 시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어디 이것이 시인과 시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그 꿈이 시가 되기도 하고, 음악이 되기도 하며, 철학이 되기도 하고, 종교가 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정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에 비하면, 그것을 꿈꾸는 사람은 언제나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하지만 사람이 추하다고 그가 꾸는 꿈까지 쓰레기 취급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비루한 현실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꿈꾸는 것은 언제나,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형성 충동의 표현이다. 우리가 꿈을 포기하고 나면 남는 것은 안으로는 비천한 욕망이요, 밖으로는 남의 흠이나 들추는 헛된 시비지심밖에 없다. 그런 세상에서 꿈은 멸시되고 억압된다. 오늘날 이런 사정은 정치적 영역에서 더욱 염려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대다수 정치인들은 아무런 꿈을 꾸지 않고, 그나마 다른 세상을 꿈꾸는 소수의 사람은 남이 꾸지 않는 꿈을 꾼다는 이유로 박해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정치가 타락한 것은 정치인 이전에 우리들 시민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꿈꾸는 시인이 되자. 꿈꾸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시민이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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